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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불사 홈 > 붓다의 메아리 음반/서적
   김성철 지음 '불교 초보 탈출 100문 100답' [불교도서] 2009-10-26 / 5303  

 
지은이 : 김성철
책정보 : 교리/철학/사상/신국판 /408p
발행일 : 2009년 08월 31일
ISBN : 978-89-7479-565-8, 03220
가격 : 15,000원


책 소개

“서산 대사도 살생으로 인한 과보를 받았을까?”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사실일까?”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해 참전했던 서산 대사는 살생으로 인한 과보를 받았을까?〉〈불자가 아닌 사람이 불교의 계율을 어겨도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초기 선승들은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데 사실일까?〉〈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사실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이런 질문에 우리는 그리고 불자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상식’에 의존해 답변하거나 ‘그럴 수도 있다’고 무책임한 답을 만들어 낸다면 그 사람은 아마 영영 불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짝 떠오른 의문이나 풀리지 않는 의심을 파헤치기 위해 팔만사천의 경전을 헤집거나 선지식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현대를 살아가면서 수없이 부딪히는 경제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혹은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 대해 불교의 명쾌한 답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것들이 불교 공부에 막 눈을 뜨고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어려움이다.
이 책은 100개의 질문 그리고 100개의 답변을 통해 이런 고민을 단박에 풀어준다.


경전과 선지식을 대신할 만한 명쾌하고 논리적인 답변!

불교 초심자부터 불교 전공 학생, 물리학 교수, 스님 등 만 3년 반 동안 저자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질문들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기발하다. 그런데 질문보다도 저자의 답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명쾌한 답변 때문이다. 저자는 무엇을 물어도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히 경전에 근거해 논리 정연하고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서산 대사도 살생으로 인한 과보를 받을까?>에 대한 답변에서는 “인과의 법칙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고,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고 불교의 인과론을 설명하며 “따라서 살생에 참여한 서산 대사는 그에 따른 과보를 받았다.”고 ‘경전’을 근거로 답변한다.(마치 용수보살도 작은 과보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던 것처럼)
다만 “삼독심에 의한 살생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살생’을 구분”해야 하고 서산 대사의 살생을 “미래나 내생에 고통의 과보를 받을 각오하고서, 보다 큰 선을 위해서 살인을 하고 살생을 하는 것이 보살도”로 규정한다.
서산 대사의 ‘위대함’에 대해 의심하지 않지만 누군가 한 번쯤 의심해 볼 수 있는 질문이다. 필자는 이런 질문을 통해 불교의 인과론에 대해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 중에는 불교를 곡해할 수 있는 것들이 무척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기 선승들은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데?>라거나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류의 물음.
저자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이런 주장은 경전이나 선어록 그리고 불교사를 꼼꼼히 살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말’일까 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장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현대 불교학 탄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초창기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불교를 연구했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 불교의 신비한 교리들은 모두 잘라버린 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만을 추출하여 불교라고 규정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면 초기 불전의 2/3 이상이 폐기되어야 하고, 초기 선승들이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마치 미래인들이 난지도를 파보고 썩지 않은 라면 봉지를 근거로 “현대인들은 라면만 먹고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불교에 대한 갖가지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책과 사람, 즉 ‘경전’과 ‘선지식’이다. 하지만 궁금할 때마다 선지식을 찾아 나서기도 어렵고, 답 하나 알기 위해 수많은 경전과 논서를 뒤지는 것도 쉽지 않다.
요즘엔 ‘네이버 지식 검색’과 ‘다음의 카페’에 질문을 올려보지만 익히 알려진 대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불교에 대한 질문과 답변은 상당 부분 오도된 지식 투성이며 선사 흉내를 내는 개인 답변에 불과하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철저히 경전에 의거하고 있으며 초기불전과 대승경전을 넘나들며 질문자들의 물음에 명쾌하게 답변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돋보인다.


“궁금하면 물어라!” 이것만 알면 초보는 탈출

이 책은 크게 ‘수행’, ‘교리’, ‘생로병사와 윤리’ 그리고 ‘불교와 이웃종교’에 대한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수행>에 대한 질문은 ‘불교 신행의 목표는 무엇인지’, ‘수행자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윤회의 고리를 끊었다면 그 이후의 상태는 어떤 것인지’부터 초기불교, 대승불교 그리고 탄트라 불교에 대한 질문과 답들로 구성되어 있다.
<교리>에 대한 질문과 답에는 불교의 우주관이나 시간관을 비롯해 오온이나 12처 등 불교의 핵심교리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윤리>에 대한 장에는 ‘선과 악, 윤리의 기준이 무엇인지’, ‘음행에는 플라토닉 러브와 같은 것도 포함되는지’, ‘뇌사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실생활에서 일어날 만한 궁금한 것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이웃종교>에 대한 장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힌두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의 이론과 불교를 비교하는 글들이 할애 되어 있다.
모든 질문이 관련 책 하나를 다 읽어도 하나의 답을 얻기 힘든 것들이지만 저자는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통해 질문을 올린 사람들의 궁금증을 단박에 해결해 주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불교에 막 입문한 사람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교과서이자 사전’과 같은 책이 될 것이다.


“만 3년 반에 걸친 문답”, 체계불학

이 책에 나온 질문과 답변은 김성철 교수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라온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성철 교수는 만 3년 반에 걸쳐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200여 개가 넘는 질문을 받았다. 그 중 이 책에는 중복된 질문과 현학적인 질문을 제외하고 100개를 추렸다.
그는 불교계에서 누구보다 명쾌한 논리 전개와 풍부한 필력으로 이름이 높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 궁금한 내용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필자는 “매번 질문이 올라올 때마다 자판을 두드리기가 망설여”졌지만 “기발한 질문, 쟁점이 될 만한 질문, 진지한 질문이 올라오면 만사 제쳐 두고 컴퓨터 앞에 앉게”됐다고 말한다.
그의 답변은 교리나 수행을 ‘학문’으로만 보지 않고 철저히 ‘신앙’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체계불학’이다. 서문을 통해 밝혔듯 그는 어떤 글을 쓸 때나 이것을 염두에 둔다.

근대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인문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경영을 위한 학문적 보조 수단인 지역학, 언어학, 종교학 분야에서 불교가 연구되었는데, 서구 인문주의 전통의 객관성과 과학성, 합리성을 방법론으로 삼았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인문학적 불교 연구는 불교에 대한 인습적 오해를 시정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갖지만, 마치 실험동물을 다루듯이 불교를 해부하다 보니 불교의 종교성이 망실되기 쉽다. 갖가지 이설(異說)들이 난무한다. … 이를 접한 불자들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학문과 신앙이 하나된 새로운 시스템을 연구 중에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답변들은 저자의 이런 노력의 흔적이 흥건히 배어 있다.
아직도 저자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궁금증을 묻는 ‘불교 초심자’들의 질문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머리말

책 머 리 에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부임하기 전까지 필자는 인터넷에 무지했다. 컴퓨터라면 오직 ㅎ.ㄴ 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원고를 작성하는 데 활용할 뿐이었다. 그 이외의 용도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2001년 법학과 김재문 교수님께서 경주캠퍼스 부총장 소임을 맡으면서, 학생들과의 소통을 위해 모든 교수들에게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셨다. 학교의 강요(?)에 의해 홈페이지를 이용하던 중, 홈페이지란 것이 참으로 많은 용도로 활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 불교정보화의 선각자라고 부를 수 있는천불동[www.buddhasite.net]의 이승훈 선생님의 도움으로, 2003년 1월에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새로 담당하게 된 <불교와 정보환경론>이라는 전공강의의 보조수단으로 홈페이지를 활용할 뿐이었는데, 개설 후 만 2년이 지났을 때부터 방명록에 불교와 관련한 일반 불자들의 질문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기발하지만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이 많았다.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차근차근 답을 하다 보니 어느 새 문답이 200여 회를 넘었다. 그러던 중 작년 7월 모 출판사로부터“내용 불문하고 신간을 집필해 달라.”는‘백지 원고’청탁을 받았다. 수년 전에 시작한 개인적 연구(고구려 승랑 연구)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기에 선뜻 응하지 못하다가 필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의 문답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의 권유도 있고 해서 문답이 어느 정도 쌓이면 언젠가는 책으로 묶을 예정이었는데 그 시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5년 1월부터 2008년 6월까지 만 3년 반 동안 있었던 문답 가운데 절반 정도를 추린 후 주제별로 묶어 이렇게 단행본으로 꾸미게 된 것이다. 몇 가지에 대해

서는 문답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내용을 보완하였지만 대부분 게시판의 문답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본서에는‘체계불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체계불학(體系佛學: Systematic Buddhology)은 수년 전 불교학 방법론을 모색하는 논문을 쓰면서 필자가 고안했던 신조어다. 체계[System]

란 용어는 초기불교에서 대소승, 그리고 밀교와 정토, 화엄과 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교사상을 수미일관한 체계로 해석한다는 의미이고, 불학[Buddhology]은 기독교의 신학[Theology]에 대응하는 용어다. 굳이 정의한다면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성과에 토대를 두고 불전의 가르침을 유기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수미일관한 하나의 신행체계로 구성해 내는 불교학’이 체계불학이다.

근대 이후 서구를 중심으로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인문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제국주의시대에 식민지 경영을 위한 학문적 보조수단인 지역학, 언어학, 종교학 분야에서 불교가 연구되었는데, 서구 인문주의 전통의 객관성과 과학성, 합리성을 방법론으로 삼았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인문학적 불교 연구는 불교에 대한 인습적 오해를 시정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갖지만, 마치 실험동물을 다루듯이 불교를 해부하다 보니 불교의 종교성이 망실되기 쉽다. 갖가지 이설異說들이 난무한다. “십이연기설에 대한 태생학적 해석은 후대에 삽입된 것이다.” “여래장 사상은 우빠니샤드적인 아뜨만 이론의 재판再版이다.”“천태의 오시교판은 허구다.”“『능엄경』과『원각경』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이다.”… 이를 접한 불자들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의 경우도 근대 이후 인문학적 연구의 메스가 가해지긴 했지만, 신구약의 가르침을 체계화한‘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 신앙의 좌표 역할을 했기에 그 종교성은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문헌학을 포함한 인문학적 기독교 연구는 조직신학의 주변부에 기생하는 벌레 정도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곧 서구화를 의미했던 아시아에서는 근대화의 위세를 등에 업은 인문학적 불교학이 불교신행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불교의 종교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불교에 대한 객관적, 과학적, 합리적 연구는 중요하며‘인문정신의 극한에서 발견된 진리’가 바

로 불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연구가 오로지 문헌학적, 인문학적으로만 이루어질 경우 불전은, 종교 성전의 지위를 잃고『희랍신화』나『논어』,『 맹자』,『 장자』와 같이 인문교양도서로 전락하는 비극적 운명을 맞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신학이‘계시의 학문’또는‘접신接神의 학문’이라면, 불교학을 포괄하는 불학은‘깨달음의 학문’, 즉‘각학覺學’이다. 그 방향이 상반된다. 공간적 언어로 표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진리에 대해연구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마음에서 올라오는 깨달음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각학이고 불학이다. 최근 들어 서구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기

존의 불교연구방법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연구방법을 모색하면서 그에 대한 논문집이『Buddhist Theology』(2000)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바 있지만, 제목에서 보듯이 그‘발상發想’에서조차 신학의 옷을 벗지 못하고 있다.

삼계설의 천신天神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적 견지에서는 불학의 하위 분과에‘접신의 학문’으로서의‘신학’을 위치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기독교 신학의 사고방식이 인문학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지금의 학문 풍토에서는, 신학을 하위 분과로 거느리는 불학의 건립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그런 요원한 목표를 지향한다

고 해도 전략적으로 볼 때 우선 불학을 신학과 대등하게라도 자리매김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기독교의‘조직신학’에 비견되는‘체계불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티벳의 대학장大學匠쫑카빠(Tsong khapa: 1357~1419) 스님의『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이 그 전범典範이라고 생각되어 십여 년 전부터 강의나 글을 통해 이를 적극 소개해왔다. 그러던 중 필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몇몇 분들이‘현대적 체계불학’또는‘한국적 체계불학’을 구성해 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불전의 양은 다른 종교성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현대 불교학의 인문학적 연구 성과를 취합한 후 옥석玉石을 감별하여 수미일

관한 신행체계로 구성해 내는 일은 필자의 능력 밖의 일로 생각되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앞으로 눈 밝은 후학에 의해 그 작업이 완수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본서에 대해 감히 체계불학이라는 부제를 사용하였다. 본서에 불전 전체, 인문학적 불교학의 연구성과 전체가 모두 망라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하나의 질문에 답하면서 모든 답변들이 수미일관한 불학 체계의 한 부분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머리글을 마무리하면서 몇몇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포항공대 수학과의 강병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누구든 홈페이지를 운영할 경우 게시판에 올라오는 질문에 답글을 다는 것은 ‘귀찮은 일’일 수 있다. 필자 역시 매번 질문이 올라올 때마다 자판을 두드리기가 망설여진다. 그런데 기발한 질문, 쟁점이 될 만한 질문, 진지한 질문이 올라오면 만사 제쳐두고 컴퓨터 앞에 앉게 된다. 몇 줄 정도의 답글을 달려고 자리에 앉지만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어느 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장문의 답글이 만들어지고 만다. 필자가‘답글 삼매’에 빠지는 것은 오로지 질문의‘기발함’과‘진지함’때문이었다. 개설 후 만 2년간 적막 속에 있었던 방명록 겸용의 게시판이었는데, 게시판을 활성화해 주신 분이 바로 강 교수님이었다. 필자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오류도 지적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답하기 곤란한 비판적 질문’들을 주로 올림으로써 필자의 탐구심을 자극하셨다. 강 교수님의 참여 덕분에 단순한 방명록이 <불교문답 게시판>으로 변모하였고, 현재 열려 있는 <자유게시판>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서두에서 소개했던 천불동의 이승훈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십 수년 전 출간되었던 필자의 번역서『불교의 중심철학』(무르띠 저, 경서원 간)의 편집 담당자로서 처음 만나 뵌 이후 불교정보화와 관련하여 이 선생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모뎀을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던 시절‘천리안불교동호회’로 시작한 천불동은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불교학 자료실이 되었다. 불교학자들이 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불교정보화와 관련한 최신 자료들이 계속 제공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불자가수 이메이 우이Imei Ooi의 <자비송[The Chant of Metta]>을 처음 발견하여 그 가사를 손수 번역한 후 우리 불교계에 보급시킨 분 역시 이 선생님이었다. 필자가 천리안에서 제공하는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활용하면서 자문을 구하던 중 이 선생님께서는 보다 큰 규모의 홈페이지를 운영할 것을 권유하셨고, 이 선생님의 배려로 필자의 홈페이지는 현재 천불동 서버에 입주해 있다.

필자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질문을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신오유, 정광윤, 유성열, 최명호, 김영목, 전일원, 김종철, 김일룡, 우종인, 이상욱, 박연숙 … dendub, 用花, 탐진치, 길벗, 공유, 무명, 백당시기…. 대부분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는 잔잔한 등불의 역할을 하고 계실 것이다.

불교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춘 분들과의 문답을 모은 대중성이 떨어지는 원고였기에 애초에 출간을 의뢰했던 출판사에서 원고를 검토한 후 몇 달 후 되돌려주셨다. 새롭게 출판사를 찾던 중 불광출판사 류지호 주간께 문의하였고 며칠 후 흔쾌히 출간을 수락해 주셨다. ‘경제논리’ 에 역행하는 불광출판사의‘인문정신’에 감사할 뿐이다. 아울러 산만한

문답들을 재정리하고 편집해 주신 첫 독자, 출판사의 이상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불기 2553년(2009) 8월 17일
도남圖南 김성철金星喆 합장


차례

01 수행

001 불교의 신행 목표는 무엇이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002 수행자는 무엇을 얻고자 멸진정(滅盡定)에 드는 것입니까?
003 열반하여 윤회의 고리를 끊었다면 그 이후의 상태는 무엇인지요?
004 도대체 무엇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005 불교 수행을 하지 않아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006 계, 정, 혜 삼학은 무엇입니까?
007 계, 정, 혜를 어떻게 닦아야 하나요?
008 삼독심이란 무엇이고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009 성불은 인간계에서만 가능합니까?
010 색계 선(禪)의 경지에서 아라한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11 지관수행과 구차제정의 관계, 그리고 제4선과 깨달음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012 세속적 복락을 초래하는 유루업도 성불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까?
013 멸진정에 든 수좌에게 전신마취를 건다면?
014 무여의열반에 드신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015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 조사선의 수행법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었습니까?
016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비유로 중관, 간화선, 위빠사나를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017 초창기의 선승들은 좌선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018 남종선과 간화선은 어떻게 다르고, 남종선의 스님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나요?
019 인간의 언어는 깨달음에 장애가 됩니까?
020 훌륭한 선사란 어떤 분이며, 선문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021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022 밀교의 복덕 쌓기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023 탄트라(Tantra)불교란 무엇입니까?
024 밀교에서 말하는 색신, 법신, 보신, 화신은 무엇입니까?
025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근본적인 기준은 무엇입니까?
026 대승에서도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합니까?
027 불교수행과 생업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02 교리

028 불교에서는 우주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나요?
029 시간에 시작이 있습니까? 우주공간에 끝이 있습니까?
030 객관세계는 무엇인가요?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는 건가요?
031 물질과 마음, 그리고 인간과 지구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나요?
032 불교에서는 하늘나라[天上]와 신(神)을 어떻게 보나요?
033 연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034 연기론은 결정론 아닙니까?
035 윤회와 업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036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037 윤회와 시공간 개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038 악업의 종자는 수행이나 참회를 통해 사라지나요?
039 윤회는 삼강오륜 등 유교적이고 상식적인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이론이기에 잘못된 것 아닌가요?
040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가르침은 다른 교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041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와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042 의도적으로 짓는 업은 죄가 되지 않습니까?
043 개미나 모기를 죽여도 악업이 됩니까?
044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과보는 무엇입니까?
045 자연 정복으로 현대문명을 건설한 ‘인간’은 과보를 받게 되는 겁니까?
046 깨달은 부처님도 업을 짓습니까?
047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048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049 12처가 공하다는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1
050 12처가 공하다는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2
051 12처가 공한 것을 자각해도, 고통은 그대로 있는 것 아닙니까?
052 공이란 무엇입니까?
053 중관학에서 4구 판단 모두를 비판한다고 하지만, 그런 비판 역시 제4구 아닙니까?
054 중관논리의 ‘판단 비판’ 중에서 제1구가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55 불공(不空)은 무슨 뜻입니까?
056 아공법유(我空法有)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057 유위법(有爲法), 무위법(無爲法)은 무엇입니까?
058 우리의 마음, 즉 식(識)이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059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1
060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2
061 유식무경이라고 해도 나의 식(識)과 남의 식이 구분되기에 실재론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062 부처님의 법신, 보신, 화신은 무엇입니까?
063 열반에 든 부처님이 색신으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까?
064 여래장사상은 유아론(有我論)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03 생로병사와 윤리

065 선과 악, 윤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066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067 채식도 살생 아닙니까?
068 석가족의 멸망 일화에서 보듯이 물고기를 잡거나 파리, 모기를 잡아도 그에 대한 과보가 그렇게 엄청날 수 있습니까?
069 살생이 나쁜 것은 알지만 농사를 짓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070 100만원을 사기 당했을 때 그것을 받아내는 것이 좋을까요, 잊는 게 좋을까요?
071 어떻게 하면 음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까?
072 음행에는 ‘플라토닉 러브’와 같은 것도 포함됩니까?
073 지범개차의 정확한 의미가 궁금합니다. 또 임진왜란 때 살생을 했던 승병들은 과보가 없을까요?
074 불자가 아닌 사람이 불교의 계율을 어길 경우 그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까?
075 반야바라밀다를 체득할 경우 도덕적,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까요?
076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077 뇌사자의 장기기증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078 중음신이 새로 태어날 때 입태는 언제 이루어집니까?
079 중음신에게서도 수, 상, 행이 작용합니까?
080 중음신에게도 물질적인 몸이 있습니까?
081 미물인 벌레가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082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는 삼계 밖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04 불교와 이웃종교

083 종교는 왜 ‘위대한 거짓말’이라는 말을 들을까요?
084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 아닙니까?
085 불교의 열반과 기독교의 영혼불멸 사상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086 불교에서 말하는 범천은 타종교의 신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생각해도 맞는 겁니까?
087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088 불교 이전의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089 불교의 윤회설과 외도의 윤회설은 어떻게 다른가요?
090 힌두교에도 육도윤회설이 있었나요?
091 샹까라 신학의 무명과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은 어떻게 다른가요?
092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와 원효 스님의 ‘일심(一心)’은 어떻게 다른가요?
093 진여는 힌두교의 브라만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094 힌두교의 아뜨만은 공(空)과 같은 것 아닙니까?
095 크리슈나무르티의 오도 체험과 불교의 깨달음은 같은 것입니까?
096 ‘여래장’이나 ‘불성’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마찬가지 개념이 아닌가요?
097 가톨릭 신부인 라모뜨 교수의 불교 연구는 신뢰할 수 있나요?
098『주역』의 음양설을 유식학이나 연기설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099 융의 집단무의식과 아뢰야식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100 타종교의 권력 앞에서 자신의 종교심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저자 정보

김성철(홈페이지 주소 : http://www.kimsch.net/)

1982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199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철학박사)
1993년~1999년 동국대(서울, 경주) 및 중앙승가대 등 강사 역임
2000년 3월~현재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교수
현재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사)한국불교학회 이사, 불교학연구회 부회장, 인도철학회 편집위원, 보조사상연구원 편집위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연구』(지식산업사,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불교시대사, 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중관사상』(민족사), 『회쟁론 범문?장문 문법해설집』(경서원)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론』, 『회쟁론』, 『백론?십이문론』, 『불교의 중심철학』(이상 경서원) 등이 있다.
1996년 제6회 가산학술상(가산불교문화연구원) , 2004년 제19회 불이상(불이회), 2007년 제1회 올해의 논문상(만해사상실천선양회) 등을 수상했다.


출처 : 불광출판사 홈페이지 '새로 나온 책'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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