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왕이 대장경을 달라고 하는데 아예 경판을 보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나라에 경판이 적지 않습니다. 보내준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태종과 승지가 나눈 대화의 일부분이다. 조선은 숭유억불을 국시로 내걸고 세운 사대부의 나라였다.
외적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조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있을 때 고려의 집권세력과 민초들이 한마음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은덕 한 가지였다. 팔만대장경은 그렇게 한 나라가 처한 누란의 위기에서 피어낸 장엄한 꽃이었다.
팔만대장경이 목판이라는 것에 주목한 나무학자 박상진은 경판의 소재로 자작나무를 사용했다는 지금까지의 통설을 의심하고 피난왕궁이 있던 강화도에서의 제작을 문제로 삼았는데 그런 의심과 문제 제기의 배경에는 그의 전문가로서의 식견과 연구결과가 자리하고 있다.
자작나무가 아니라 산벚나무를 주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강화도보다는 해인사가 경판 제작에 더 합당한 장소였을 수 있다는 제안은 첨단 분석기술을 사용하여 밝혀낸 대장경판 목재의 세포배열상태와 고대로부터 특정 나무를 나타내는 데 사용한 문자의 용례 추적 결과와 기후대에 따라 나무의 자생지가 달라지는 생태학적 사례와 대장경이 제작된 시기가 전시였다는 시대상황의 참작까지가 뒤를 받쳐주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란의 와중에서 그것도 16년이라는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팔만대장경에는 500년 왕조의 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글자 수에 버금가는 자그마치 5,200만여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 하나를 새긴 후에 한번 합장을 했을 만큼 정성을 들였다 하니 5천만 번을 넘는 합장과 기원의 공덕이 함께 했을 팔만대장경은 ‘글자를 새기는(刻字)’것에 더해 ‘고통을 새기는(刻苦)’작업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지난 300여 년 동안만 해도 화마가 일곱 차례나 찾아왔었고 무지한 위정자들을 만나 바다 건너 낯선 땅으로 내쳐질 위기를 탈없이 넘겼으면서도 오늘 우리 앞에 저리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팔만대장경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렇더라도 어찌 세월이 무심타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인다. 숱한 내우외한의 위기를 거치면서도 750년 세월을 무사히 버텨낸 것을 내세워 판전(板殿) 건물의 뛰어난 건축술을 찬탄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세계에 단 하나만 남아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할 인류 전체의 유산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보다 항구적인 대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다.
원이 크면 그 힘도 크고 오래 가는 법일 테니 무량지혜와 일구월심의 자세가 어찌 옛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겠는가.
<출처 : 불교포커스 3월 27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