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가장 큰 조건은 감사지심(感謝之心)입니다. 누가 욕하거나 해코지해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소중한 자산을 얻은 것입니다. 다음은 미소와 침묵입니다. 입은 사람에게 문과 같은 것으로 잘 지키면 행복해질 수 있지만, 다 털어버리면 만날 못 살고, 시비가 생기게 되지요.”
불교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인 고산(76) 스님이 회고록 ‘지리산의 무쇠소’(조계종출판사)를 펴내고 6일 자신이 조실로 있는 경남 하동 쌍계사에서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전계대화상이란 비구와 비구니계 등 종단의 승려 자격을 부여하는 직책으로 종정 다음 가는 높은 위치다. 불교 수행자가 직접 회고록을 발간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회고록에는 불교계의 큰어른이 되기까지 피나는 역정이 담겨 있어 세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고산 스님은 지금도 매일 새벽 3시 시자들이 기상을 알리는 도량석 시간에 어김없이 일어나 법당에서 108배를 하는데, 신세대 스님들은 ‘고산 큰스님은 전생에 무슨 죄가 많기에 저리도 참회를 많이 할까’ 하고 수군거릴 정도다.
“저 자신을 위한 참회의 뜻도 있지만,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힘이 다하는 날까지 기도정진하고 싶습니다.”
그는 1945년 13세 때 모친을 여의고 연일 눈물로 지내던 중 아버지를 따라 부산 범어사에 갔다가 당대 선지식 동산 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제자가 되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하루아침에 불가에 몸을 던졌다. 그때부터 해오던 ‘관음기도(관세음보살에게 자기 소원을 비는 기도)’를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물론, 기도를 통해 모친을 만나고 대화까지 했지만, 기도는 어려울 때마다 돌파구를 열어줬다.
그는 불교에 귀의해서도 예의 철저함으로 수행자의 본분을 올곧게 지켰다. 신심은 1948년 사미 시절 부산 기장 해불암에 있을 때 부쩍 향상된다.
“하루는 주지 스님의 부친이 고추밭에 비료를 주라고 해서 주었는데, 오후에 가보니 고추가 다 말라 죽은 거예요. 뿌리에서 한 뼘 떨어진 곳에 비료를 줘야 하는데, 바짝 붙여 줘 뿌리가 그대로 타버린 겁니다.”
할아버지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생명체인 고추에게 미안했다. 그때 고산 스님은 ‘이 세상의 모든 기술은 다 배우리라’ 원을 세우고 하루 3시간 이상 자지 않고 채소 기르는 법에서 원예에 이르기까지 일체 노동일을 빠짐없이 연마습득했다. 심지어 궁중요리까지 배웠다.
기도와 울력을 지성으로 하던 그는 1966년 봄 어느 날 삼천대천세계가 손바닥에 놓인 구슬처럼 환하게 보이는 ‘식광경계(識光境界)’의 경지를 경험한다. 생각만 하면 신도들의 행동이 보였다. 이것은 신도들에게 미래 닥칠 일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폐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 후 스스로 중단했다. 대신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해 강사, 율사, 포교사, 선사, 대종사 등 종단에서 ‘사(師)’자 붙은 것은 다 따냈다. 강사가 되려고 공부할 때는 끼니도 자주 걸렀다. “괘종시계를 맞춰놨는데,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소리를 못 들었지요. 나중에는 괘종시계 3개를 갔다 놨으나 태엽이 다 풀릴 때까지도 소리를 못 들은 겁니다.”
회고록에는 그만의 독특한 리더십이 등장한다. 괴팍한 대중들 버르장머리 고쳐준 이야기, 불사를 위해 신도들을 발심하게 한 이야기, 불교의 폐습을 없앤 사건, 목적달성의 집요함과 공금 사용의 철저함 등 불교를 뛰어넘어 종교지도자라면 반드시 새겨둬야 할 수행 덕목들이 곳곳에 스며 있다.
지리산 쌍계사의 밤이 깊다. 경제난을 겪고 있는 세인들의 시름을 의식한 듯, 고산 노장은 ‘一勤天下無難事(일근천하무난사)’라는 글을 하나 써 준다.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