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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불사 홈 > 붓다의 메아리 음반/서적
   책으로 다시 온 정대스님의 현현顯現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불교도서] 2008-11-20 / 4817  

 






























늦가을 고목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바닥을 뒹군다.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던 들녘도, 단풍이 들어 오색 비단에 쌓인 듯 곱던 산야도 공(空)하기만 하다. 가슴에 휑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열반송이 있다. 바로 전 조계종총무원장 월암당 정대스님의 입적게이다.

올 때도 죽음의 관문에 들어오지 않았고
갈 때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우리 모두 꿈 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

고려의 백운거사는 ‘죽고 삶이 꿈 하나라 무엇을 근심하리’ 라며, 인생의 번뇌를 꿈으로 비유했다. 어디 백운거사뿐이랴.

당 나라 때 노생은 한단의 여관에서 도사 여옹의 베개를 베고 잠깐 누웠다가, 아내를 맞이하고 연국공이 되고 다섯 아들을 낳아 팔순이 넘도록 사는 꿈을 꿨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영화로운 꿈을 꾼 시간은 여관 집 지어미가 저녁밥을 짓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삶은 고작 저녁밥 짓는 것 이상은 아니다. 일연스님이《삼국유사》에 조신설화를 남긴 까닭도, 서산대사가 <세 꿈 노래(三夢歌)〉를 송(頌)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주인은 손을 만나 꿈 이야기를 하고
손은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네
여기 둘이 다 꿈이라고 말하는 저 나그네
그도 또 꿈 속 사람이로세.
-서산대사의 <세 꿈 노래(三夢歌)〉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것은 공(空)과 무상(無常)에서 비롯된다. 《금강경》에서는 인생의 무상함을 ‘꿈과 같고, 곡두(幻)와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와 같고, 번개와 같다’고 비유해 육여(六如)라고 일렀다. 그렇다면, 삶이 초저녁 풋잠처럼 허망한 것이라면,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함허 득통대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삶이란 구름 한 장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구름 한 장 사라지는 것/ 뜬 구름 본시 그것 빈 것이니/ 이 몸이 나고 죽음 다를 것 없네/ 그 중에 신령한 그 무엇 하나/ 언제나 길이길이 맑아 있나니/ 옛 사람 그 것 일러 ‘향수해(香水海)’ 같고/ 깊고 깊은 ‘보타산(補陀山)’과 같다 하였네.

여기서 '신령한 그 무엇'은 세속에서 말하는 육체의 반대개념인 영혼이 아니다. 진여(眞如)이다. 함허당이 진신화상이 열반했을 때 ‘시원하다! 시원하다! 하늘로 올라가 안개 속에 놀며 티끌 밖에서 거니는 구나’라고 노래를 했던 것도 같은 이유. 스님들은 법신이 가고 없어도 그 스님들이 남긴 설법(說法)만은 오롯하니, 스님들의 법문은 두루 자재한 진여(眞如)인 것이다.

대범한 품성을 지녀 조계종총무원장을 역임하면서 종단의 숙원사업이었던 ‘총본산성역화’를 성사시켰는가 하면,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중들에게 두루 인기가 높았던 월암당 정대스님의 법문집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초담)》이 출간됐다.

정대스님의 열반 5주기를 맞아 월암문도회가 출간한 이번 법문집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대중에 대한 자비심을 중시했던 정대스님의 가르침에 부응하기 위해 그야말로 대중적으로 편집됐다.

샤갈의 화폭을 연상시키는 박남철 화백의 그림과 정대스님의 입적게를 조화시킨 표지부터가 권위를 내세운 나머지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이미지만 부각된 여느 법문집과는 차별성을 띤다.

정대스님의 행장도 마치 앨범 책을 넘기는 것처럼 구성돼 가시적인 효과는 물론이고 가독성도 월등히 높다. 정대스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사진앨범을 넘기면 조계종총무원장 지관스님의 서문과 시인이기도 한 신흥사 회주 오현스님의 추천의 글이 실려 있다.

지관스님은 글을 통해 “월암당 정대 대종사의 모습은 결코 수행승과 사판승 어느 한 가지로 규정짓기에는 판단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치열한 구도행을 통해 쌓은 법력을 구체적인 종단 운영의 현장에서 꽃피우셨으니 선교이사(禪敎理事) 모두 두루 회통하여 활활자재한 활구법문으로 열어 가신 삶이었습니다”라고 스님의 발자취를 평가하고 있다.

오현스님도 ‘울고 가는 거냐 웃고 가는 거냐/ 갈대 숲 기러기들 떼 지어 날고 있다/ 하늘도 가을 하늘은 강물에 목이 잠겨 있다’는 시편으로 ‘정대스님의 진위 앞에 옷깃 여미고 꽃 한 송이 올려 그 공덕을 거찬(擧讚)’하고 있다.

책의 본론격인 법문은 치열한 구도행 끝에 얻은 깨달음을 사회에 회향한 정대스님의 삶의 행장에 걸맞게 △깨달음 △수행 △회향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 있다.


스님의 법문 중 하나를 살펴보자.

‘입으로는 공안을 들먹여서 속이고 권력자 앞에서는 연신 굽실거리네. 이 막 돼 먹은 세상에 진짜 스승은 금란가사 입고 앉은 저 음녀들이네.’
-<불성에는 귀천이 없다>에서

수행자의 옷을 입고 속으로는 온갖 삿된 짓을 서슴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음녀(淫女)로 비유한 선시를 인용하면서 정대스님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수행자들을 힐난한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음에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음을 일깨워준다.

평소 소신이 그랬던 지라 스님은 깨달음에 대해서도 일상성을 강조했다.

“여러분들은, 화두라고 해서 없을 ‘무’자나 ‘시심마’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끌어안고 수행을 한다고 마음 끓이지 말고, 현실에서 가족들 보살피고 동료들과 웃고, 울고 가끔은 다투기도 하면서 마음속에 화두, 즉 ‘늘 잊지 않고 지내는 어떤 생각’을 갖고 생활하면 그것이 곧 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생활에 필요한 선입니다.”

-<불교의 현대화란 없다>에서

이처럼 정대스님의 법문은 뜬 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요긴한 얘기이다. 즉, 사구선이 아니라 활구선이다. 하여 스님의 법신은 가고 없어도 스님의 법문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의 법문 뒤에는 평소 스님과 친분이 두터웠던 지인(知人)들의 회고담이 실려 있다.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 고심정사 주지 원택스님, 화성 신흥사 주지 성일스님, 용화사 주지 성주스님, 박지원 국회의원, 서화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백도웅 목사, 이석심 조계종총무원 총무차장.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씨, 유동관 KAIST 수학과 학생 등 정대스님을 회고하는 이들의 글에는 스님과의 애틋한 인연들이 잘 묻어 있다.

책의 마지막은 임지은 <월간 중앙> 기자와의 대담으로 마무리된다. 대담에서 스님이 던진 말들은 생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추워질 때가 되면 추워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지요. 사람도 세월이 가면 늙는 게 당연한 것이고요. 우리 그런 거 다 알고 있거든. 그런데 살아가면서는 그걸 잊고 살아. 결국 죽음의 종착역으로 가는 것인데……. 누가 뭐라 해도 그날 저문 해는 다시 내 앞에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니 자연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 곁에 왔다 간 천진불. 정대스님의 법문집은 오는 22일 용주사에서 봉행될 ‘월암담 정대 대종사 열반 5주기 추모법회’에 봉정될 예정이다.


<출처 : 불교투데이 11월 16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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