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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가 곧 부처님을 만드는 재료”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우리가 진실로 인생을 복되게 살고자 한다면, 아침저녁으로 십 분씩 참선을 하고 부처님의 경전을 독송해야 합니다. 불자라면 의무적으로 아침마다 금강경을 독송해야 할 것입니다.

참선도 아니 하고 독경도 아니 하고 염불도 아니 하면서 복을 기다리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부처님 앞에 나아가면 먼저 무릎 꿇고 예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4시간 모두 다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살아 버릇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 있는 사람의 불성이 본래 차이가 없건만 다만 어리석은 자와 깨달은 자가 달라서 같지 아니할세. 그런 까닭에 어리석은 자도 있고 지혜로운 자도 있는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반야를 외우는데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밥을 말하되 배고픈 것과 같으니 입으로만 지혜를 논하면 만 겁의 세월이 흐를지라도 견성할 수 없느니라. 입으로 밥을 말하되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의 능력을 본래 갖추고 있으며, 결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지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내던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치로 알기만 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진여본성 찾아야”

“어리석은 자는 입으로 말하고 지혜로운 자는 마음으로 행하느니라.”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법문을 들어도 자기 자신이 실천하고 있느냐를 생각지 않고 법사만을 원망해요.

법사가 똑같은 법문을 열 번을 해도 여러분이 실천하지 않고 있는 내용이라면 항상 스스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실천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법사는 반복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실천이 될 때까지 법문을 반복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논둑을 걸어갈 때, 내 더러운 발바닥으로 걸어가 보면 때때로 매우 좋은 흙을 밟고 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옛날 어른들은 대부분 흙을 빚어 부처님을 조성했어요. 그런데 이 신발을 신고 내 더러운 발바닥으로 그 흙을 밟고 걸어가지만 끝내는 흙을 캐내서 부처님을 조성하면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깔려 있을 때는 밟고 갔지만 그 흙을 캐내서 부처님을 조성하면 그 흙 앞에 우리는 절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범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범부가 곧 부처님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범부가 없으면 부처님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없으면 지혜라는 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범부라 할 것이요, 한 생각을 깨달은 즉 부처라 할 것이며, 한 생각이 경계에 부딪히면 곧 번뇌요, 한 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보리라 하는 것이니라. 보리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보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장애로 인해 똑같이 법문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또 어떤 장애로 인해 보리 즉 번뇌의 실상에서 항상 번뇌로 기
울까요.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을 때에는 부처이니 만 가지 법의 이치가 다 마음 가운데 있거늘 어찌하여 자신 가운데를 쫓아서 진여본성을 보려하지 않는가.”

보살계경에 일러 말씀하기를 ‘나의 본원자성이 청정하니 만일 스스로의 심성 가운데를 바로 알 것 같으면 다 불도를 이룰 수 있다.’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앉은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도리어 본래 본심을 알 수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말이죠, 만 피트만 올라가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끼어 있는 날 구름 아래 내려오면 세상이 캄캄하죠. 세상이 캄캄한 게 아니라 구름이 끼어있기 때문에 캄캄한 거죠.

우리 마음 가운데 탐, 진, 치라고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리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지 만일 법문을 듣고 그와 같은 그림자를 모두 걷어낸다면 우리는 실로 맑은 부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심성 가운데 있는 부처가 참 부처”

조주 스님 어록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나무로 깎아 만든 부처님은 불을 지나가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님이 아무리 찬란해도 용광로를 지나가지는 못한다. 흙으로 빚은 부처님이나 나무로 깎은 부처님이나 금으로 조성한 부처님이 참 부처님이 아니라 참 부처님은 우리들 심성 가운데 부처가 참 부처이다. 그러므로 그 참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자는 자기의 심성 가운데에 착하지 못한 마음, 질투하는 마음 왜곡된 마음, 내가 하는 그릇된 망령된 마음, 남을 업신여기고 가벼이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교만한 마음, 옳은 진리에 대해서 옳다고 말하지 못하는 삿된 마음, 아첨하는 마음, 내가 아는 오아심을 24시간 가운데 항상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잘 살피고 다른 이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귀의하는 것이 된다.”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부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 드린 대로 행하고 계신가요.

“만일 만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 법이 청정하지만은 한 생각 쓸데없는 망념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니, 악한 생각을 하면 지옥이 될 것이요, 사람이 어리석은 과보를 받는 것이 축생이고,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귀신이니라. 한 지혜가 능히 말년의 어리석음을 구제하나니.”

무슨 지옥이 있냐 하면 발설지옥, 화탕지옥, 도산지옥도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정말 이런 지옥이 있을까요. 상징언어와 사실언어의 구별이 못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리면 눈에 들어와서 눈병이 나요. 더러운 먼지는 악한 먼지예요. 선한 먼지는 참 좋은 것이에요. 다이아몬드나 금가루는 선한 먼지 아니겠어요. 하지만 악한 먼지를 제거하고 선한 먼지를 넣는다고 해서 눈병이 낫느냐. 이 눈동자가 왜 환하게 보입니까? 선한 먼지도 없고 악한 먼지도 없어서 눈에 가려진 것이 없으므로 잘 보이는 것입니다. 이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어서 밝은 것이에요.

우리 성품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한 생각을 하면 선한 것이 가려지고 악한 생각을 하면 악한 것으로 가려지고 그러므로 이 성품이 밝아지려면 선도 버리고 악도 버려서 아무것도 없어야만 합니다.

마음 가운데를 향해서 의지하며 자기의 성품 가운데서 진실로 뉘우쳐 참회를 해야 합니다.

출처 ; 만불신문 55호(2002년 4월 15일자)

2010-07-22 / 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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