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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문답은 과연 동문서답인가?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오늘날 선불교는 왜 주목받고 있는가?

불교의 선(禪)이 근래 우리 일상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화두나 평상심 같은 선불교 전문 용어들이 매스컴은 물론 일상의 대화에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선식(禪食), 선 디자인(son design), 선 스타일 등이 등장해 우리 일상의 삶과 함께한다. 원래가 ‘삶의 지혜’, ‘일상의 미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선은 새삼 각광을 받으며 21세기 대안 사상으로까지 부상했다.

직관과 감성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은 이제 불교의 종교적 수행과 신앙 차원을 넘어 경영학, 미학, 시학, 윤리학, 사회학 등 각 학문 분야는 물론 전 사업 분야에 그 사상과 철학이 응용되고 있다. 최근 서구에서 뜨고 있는 직관경영(intuitional management)을 비롯해 단순미를 강조하는 선 디자인, 유원하고 모호한 선 색(son color)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폭넓은 접근은 종교 신앙적 차원을 떠나 일반 상식 교양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이 같은 선에 대한 일반적 수요는 물론 전문적 접근에 필요한 첫 관문을 뚫기 위한 열쇠로서 선불교의 현란한 언어예술을 개괄적으로 조명했다. 우선 선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선학의 특수한 언어체계와 하층 농민들의 투박한 방언에서부터 사대부 등의 우아한 아언(雅言)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한 선불교 언어들의 실제 사용 사례를 각종 선적(禪籍)들에서 발췌, 예시해 그 뜻하는 바를 풀어나갔다.

선어(禪語)들은 사람들에게 왕왕 정신을 일깨우는 교훈과 심령을 맑게 하는 지혜를 더해준다. 선은 이제 개인의 공령(空靈)한 정신적 자유를 확보하는 일상의 상비약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선사상은 20세기로 종말을 고한 현대문명 이후의 새로운 인류문명 건설에서 사상적 주춧돌이 될 수 있는 ‘대안 사상(Alternative Thought)’으로 부상하고 있다.

산사에서 가부좌 틀고 참선하는 것이 선의 전부가 아니다. 선은 사상적, 철학적, 미학적, 언어학적, 윤리학적, 사회학적, 시학적으로 확대 조명해 학문적 체계를 수립해나갈 수 있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 ‘서문’ 중에서

선불교는 중국과 한국의 경계가 없다

중국을 원산지로 하는 오늘의 선불교는 본래의 인도불교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동아시아적 특성을 강하게 띤 독자적인 불교이다.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풍미한 선불교는 그 출발이 농민과 전란에 쫓겨 떠도는 유민(流民), 유랑승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견문과 사려의 알음알이(지해, 知解)를 배격하고 직관에 의한 돈오를 강조했다. 이는 번쇄한 논리의 귀족불교와 교학불교에 대한 대항이며 사회사적으로는 봉건 군주 체제에 맞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 정치적 혁명을 종교라는 틀을 빌어 표출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당 말, 송 대에 이르러 사대부 등의 선불교 대거 수용에 따라 문인선(文人禪)으로 변화하긴 했지만 그 원초적 뿌리인 단순성과 과격성, 평민의식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선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당송 대의 거물 선사 등 어록과 범백의 전등을 밝힌 등록(燈錄) 등에 나오는 선문답과 법문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 선의 본래 모습을 살펴보고자 했다. 선의 경우 중국의 선불교가 곧 한국의 선불교이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개산을 통한 한국의 선불교 전래부터가 모두 중국 선사상 등의 법맥을 직접 이어왔고 선불교의 경전 격인 조사 어록이나 등록도 중국 선불교의 것을 그대로 받아 써왔다. 현재 한국불교 선방에서 수좌들이 들고 참구하는 화두도 모두 100% 중국 조사 스님들의 화두이다. 따라서 이 책이 중국 선불교 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랜 역사와 오늘의 현실로 볼 때 선불교는 중국과 한국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오해할 필요가 없다. 중국 고대의 구어와 방언까지 원어를 예시, 설명한 것은 지금까지도 한문 원전을 그대로 읽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였고 특히 선사상의 원초적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선문답은 과연 동문서답인가?

선의 핵심은 어록과 등록 등에 수록돼 있는 조사들의 선문답, 또는 법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조사들의 선문답을, 질문에 대한 엉뚱한 대답을 뜻하는 ‘동문서답’의 대표로 치부하고 무슨 알 듯 말 듯한 아리송한 말을 하면 흔히 ‘선문답 하느냐?’고 한다. 실제로 어록들을 읽다 보면 현란한 언어의 마술이 펼쳐지고 우리의 상식과 논리체계를 뒤흔드는 억지투성이의 연구들이 난무한다. 그래도 그 속의 알 듯 말 듯한 한마디가 우리를 통쾌하게 하고 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선불교 언어예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 통쾌감을 100배 즐길 수 있다.

문 부처란 무엇입니까?
如何是佛?
여하시불
답 마른 똥막대기다.
乾屎?
간시궐
(…)
문 부처란 무엇입니까?
如何是佛?
여하시불
답 삼 세 근이다.
麻三斤
마삼근
- 제1장 ‘동문서답’ 중에서

선불교 책들에는 우리의 이성적 언로를 가로막는 동작어들과 일상용어에서부터 방언, 비속어, 욕설, 농담, 속담, 음사(淫辭)는 물론 깊은 뜻을 담은 현언(玄言), 우리의 언어체계를 벗어난 격외의 어구, 운치 넘치는 시어(詩語)들에 이르기까지 그 폭과 깊이가 넓고 깊다. 선불교의 고유 언어와 화법은 독특한 언어예술을 형성했다. 선언어들은 특수한 언어 형태로 각종 선적 등에 돌출했고 아언속어(雅言俗語), 문언백화(文言白話)의 각종 성분을 흡수해 자유로운 심령 활동을 조합하고 자극하는 방식으로 조성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언어들은 사람들의 안목을 요란하게 하는 꽃처럼 휘날렸고 언어의 미궁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어느 날 두 학인이 조주 스님을 참문 왔다. 조주 스님이 먼저 학인들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본 일이 있는가?”
한 스님이 답했다.
“예,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차나 마셔라.”
다른 스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여기에 와본 일이 있는가?”
스님이 답했다.
“처음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차나 마셔라.”
후에 원주가 와서 물었다.
“왜 처음 온 스님이나 그 전에 왔던 스님이나 다 차나 마시라고 하셨습니까?”
조주가 답했다.
“원주! 차나 마셔라.”
(《오등》 권4 ‘조주종심 선사’)
- 제7장 ‘농담과 문자 유희’ 중에서

선문답이 동문서답으로 들리는 이유는 선가의 교육 방법이 무의어(無義語), 격외구, 은어, 관용어, 반어(反語), 차전법(遮詮法), 현언 등을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의 선리를 설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언어는 세속의 논리를 뛰어넘는 초논리의 논리와 사로(思路)를 차단해버리고 직각적인 깨달음을 촉망시키려는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인들은 장애를 느낄 수밖에 없다. 선문답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고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선불교의 특수한 언어체계 때문이다.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불교 진리는 언어문자로 설명이 불가능함)라는 종지를 살리기 위해 상(象)을 만들어 그 속에 선리를 위탁해 설명하거나 신체의 동작, 방할(棒喝) 같은 언어 아닌 언어로써 불법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

문 화상께서는 무엇을 위해 마음이 곧 부처라고 설하십니까?
和尙 爲什?說卽心卽佛?
화상 위십마설즉심즉불
답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다.
爲止小兒啼.
위지소아제
문 울음을 그치면 어찌합니까?
啼止時如何?
제지시여하
답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한다.
非心非佛.
비심비불
(《고존숙어록》 권1)
- 제6장 ‘선어(禪語)의 연금술’ 중에서

선문답 이해의 장애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본 선리를 이해하고 그 독특한 언어체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선문답은 동문서답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장애의 문을 여는 열쇠를 만들어보고자 서툰 기술이지만 열쇠 제작의 공정을 시작해본 개척의 첫 발걸음이다.

동아시아 / 312쪽 / 1만 2000원

출처 : 출판사 책소개

2013-01-07 / 3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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