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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고승전의 ‘원측 도청설’은 역사 왜곡” [학술/문화재] 글자크게글자작게

 

남무희 박사 『신라 원측…』서 집중 조명
원측은 신라 모량부 출신의 박씨 왕족





중국이 지난 1933년 선각한 원측 스님 진영 탁본. 다소 기이해 보이는 얼굴의 이 진영은 원측 스님에 대한 중국인들의 곱지 않은 시각이 반영됐다는 지적도 많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역사는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주관의 상징”이라고 했다. 객관적인 사료를 토대로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규명하려 노력하더라도 주관적인 해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극단에 서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원측(圓測, 613~696) 스님이다.

신라 최치원은 “진기한 지혜의 칼날을 신라에서 받은 다음에 밝은 거울을 중국에 걸은 사람은 오직 우리 문아대사 그 사람”이라며 “측천무후도 어진 이를 존경해 진심으로 (원측 스님을) 부처님 같이 대했다”고 그를 찬탄했다. 그러나 송나라 찬녕 스님은 『송고승전』에서 “서명사의 원측법사는 뛰어난 근기를 지녔으나 유식론을 강의하는 곳에서 문지기를 꾀어 금전으로 매수하고 몰래 자기의 몸을 감추어 (현장의) 강의를 듣고 책을 엮었다”고 서술했다.

극히 상반된 평가다. 그렇다면 원측 스님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성유식론소』 등 탁월한 주석서들과 경전 번역으로 중국이나 티베트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희대의 선지식일까, 아니면 6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지만 남의 것이나 몰래 듣는 파렴치한 인물이었을까.

남무희(국민대 강사·42·사진) 박사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해 최근 펴낸 『신라 원측의 유식사상 연구』(민족사)는 다양한 사료 고찰을 통해 원측 스님에 대한 생애를 복원하고 그의 유식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분석한 역작이다.『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을 비롯해 중국의 각종 고승전과 중국정사 및 금석문을 치밀하게 분석한 남 박사는 원측 스님이 ‘풍향사족 연국왕손(馮鄕士族 燕國王孫)’을 표방하는 모량부 출신의 박 씨 왕족임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또 그가 15세에 당나라로 떠난 배경에는 당시 고구려·백제와의 계속되는 전쟁 상황 속에서 당과의 연결을 시도하던 신라 중고 왕실의 입장과 함께 개인적인 구법의지가 작용했음을 규명했다.

남 박사에 따르면 당으로 건너간 원측 스님은 중국에 이미 전래돼 있던 지론종과 섭론종을 비롯해 인도에서 전래된 신역 유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섭렵했다. 그러나 원측 스님은 지엽적인 교학의 영역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가 당면한 사상적 과제였던 중관과 유식, 신유식과 구유식 등 논쟁과 대립을 종식시키기 위한 ‘화쟁적 유식사상’을 확립했음을 밝히고 있다. 원측 스님은 또 당태종보다는 측천무후 정권과 훨씬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고, 현장 법사와 규기 스님이 주도하는 역경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남 박사는 특히 원측 스님이 현장 법사와 규기 스님의 『성유식론』, 『인명론』, 『유가사지론』 등 역경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그에 대한 해설서(疏)를 당사자인 규기 스님보다 더 빨리 펴낼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해 ‘도청설’을 반박하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유식론』 도청설과 관련해선 당시 원측 스님은 서명사에 머물러 있었고 번역은 자은사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도청설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는 것. 『유가사지론』 도청설과 관련해서도 이 책이 번역된 것은 648년이고 원측 스님이 이에 대해 소를 쓴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671년 이후로 그 당시는 이미 신라에까지 전해졌을 정도로 대중화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송고승전』의 ‘도청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규기 스님이 『성유식론』을 번역하자마자 원측 스님이 『성유식론소』를 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원측 스님이 이미 유식에 정통했음을 반증한다는 게 남 박사의 해석이다.

이와 함께 원측 스님의 사상이 후대에 끼친 구체적인 영향을 조명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남 박사는 원측 스님이 중관불교와 구역(舊譯) 불교 및 신역(新譯) 불교 가운데에서 어느 한 쪽만을 옹호하는 종파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이들의 견해 모두를 존중하는 ‘화쟁적 유식사상’의 태도를 취했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러한 원측 스님의 사상은 동아시아 최고의 사상가로 손꼽히는 법장 스님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고승 태현 스님에게 원측의 유식사상이 계승되었다는 점도 제시했다.

남 박사는 “원측 스님은 서명사 대덕이 된 이후 규기 스님의 자은학파와 대립했고 이러한 대립에서 융섭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원측 스님이 늘 사상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며 “원측 스님과 관련된 도청설은 이러한 갈등에서 비롯된 역사 왜곡”이라고 강조했다.




<출처 : 법보신문 06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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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6 /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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