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스님은 부산 백련화사에 주석하며 염불수행에 매진하고 있다. 산중에서 나와 도심 속 신도들과도 허물없이 만난다.
“아미타불 간절히 염원하면 깨달음 이를 것”
“관응스님 입적 전 염불수행 당부…큰스님 안목 놀라워”
불교 궁극적 목표 ‘마음 찾기’…수행 방편엔 차별없어
은사 경봉스님의 지도를 받아 치열하게 구도 정진한 선사며, 초대 교육원장을 맡아 승가교육 초석을 다진 교육지도자요, 당대 최고의 강백 관응스님을 사사한 강사인 원산스님이 또 다른 삶을 열어가고 있다. 원산스님은 최근 부산에 백련화사(白蓮花寺, 일명 하얀연꽃 절) 주지를 맡아 신도 포교, 가람 정비로 분주하다. 이 절은 지은 지 60여 년 된 신생 사찰이다. 신생 사찰이지만 산 속에 자리 잡아 산중 전통사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지난 6월16일 부산 백련화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부산 종합운동장 뒤편 역사기록관 옆에 자리한 백련화사는 조용하고 아늑했다. 등산로도 없고, 도심의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소나무 숲에 가려진 제대로 된 산사(山寺)였다. 관음재일 법문을 마치고 스님은 신도들과 상담 중이었다. 좁아서 임시로 넓힌 대웅전 앞에는 중창불사 기도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스님은 “(세납) 일흔을 앞두고 다시 부전생활을 시작했다”며 웃었다. 스님은 새 사찰에서 새벽기도를 집전하고 설법을 한다. 신도들을 찾아 법문도 간다. 일요일에는 김해의 한 공군 군 법당을 방문해 장병들과 만났다. “요즘 정말 바쁘게 산다. 사람들을 만나 할 이야기도 많고 젊은 사람들도 엄청 힘들어할 정도인데, 때로 과거생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한번도 편히 쉬지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신도 만나고 가람 잘 다듬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사라 여긴다.”
최근 스님이 꾀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염불수행이다. 스님은 널리 알려진 선사요 강사다. 당대 최고 선승인 은사 경봉스님 문하에서 참선을 배워 평생 화두선을 정진했으며, 당대 최고 강백으로 추앙받던 관응스님 문하에서 경학을 전수 받아 선교를 겸수했다. 그런데 스님은 이제 염불수행에 매진한다. 지난해 음력 10월 보름에 통도사 백련암에 ‘만인동참 만일 염불회’ 개원과 더불어 염불수행이 시작됐다.
스님이 오래전부터 주석하고 있는 통도사 백련정사는 염불도량의 맥을 잇고 있다. 통도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옛 백련암 누각에는 백련정사 만일승회기(白蓮精舍 萬日勝會期)라는 장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스님은 “이 기록에 따르면 1600여년 전 ‘동진 때 혜원 법사가 여산 동림사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해 123명이 깨달음을 얻었고, 신라의 발징 화상은 강원도 건봉사에서 ‘만일염불회’를 창설해 31인이 허공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백련결사란 바로 염불회를 뜻하며, 허공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극락세계로 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록에 백련암의 원래 이름이 백련정사라는 사실이 밝혀져 사명(寺名)을 바꾸고 큰 절에도 백련정사를 총림 염불원으로 지정할 것을 요청했다. 스님이 염불수행에 매진하게 된 연유는 또 있다. 스님은 “관응 큰스님께서 입적하기 얼마 전 사신(私信)을 보내왔는데 그 속에 염불수행을 하라는 말씀이 들어있었다”고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는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아 하던 대로 참선정진에 몰두했는데 지난 해부터 큰 스님의 안목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은사 경봉스님도 1915년 통도사 극락암에 양로염불만일회(養老念佛萬日會)를 조직했으니 스님의 염불삼매 인연이 깊고 크다.
염불 만일 결사에 들어가기 전 스님은 수좌로서 못다 한 일을 마무리했다. “30여 년간 제방 선원에서 좌복을 깔았지만 인연이 안됐는지 칠불암 아자방(亞字房)과 극락암에서 방부를 못 들였다. 칠불암은 20대 후반에 갔다가 주지 스님 문제로 해제를 하지 못하고 나와야 했으며, 극락암은 은사스님 계시는 동안 심부름 하느라 참선을 하지 못했다.”
<사진>산중 사찰 분위기가 물씬나는 백련화사 소나무 숲을 거니는 원산스님.
초대 교육원장을 맡아 승려 교육 초석을 다지던 스님은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어느날 갑자기 백련암 무문관에 들어가 버렸다. 1998년 2월부터 무문관에 들어가 3년간 하루 한 끼만 먹고 묵언하는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해제 날 전국에서 신도 1500명이 스님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모였지만 ‘마음 찾는데 온갖 것이 있다(觀心一法 總攝諸行)’는 글만 상좌를 통해 남기고 다시 문을 걸어 잠궜다. 세상과 등졌던 스님은 어느새 영축산을 지키는 수호신장 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양산시가 개발을 한다며 영축산 앞산 자락에 유흥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스님은 7년간 양산시와 개발업자와 기나긴 싸움을 벌였다. 스님은 당시 “이제 죽을 때까지 영축산과 통도사 지키는 일을 화두로 삼았다”며 각오를 다졌었다. 마침내 스님의 원력에 관청이 손을 들고 도량과 산은 제 생명을 지켰다. 스님은 다시 미련없이 선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 찾아간 곳이 칠불암과 극락암이었다. 지난 겨울 염불원을 개원하기 전에 칠불암에 방부를 들였더니 이번에는 자리가 없어 불가하다고 해 이름만 올려주면 마당이나 쓸면서 대중들 시봉하겠다고 다시 사정을 했다. 그러자 통광스님이 당신 자리를 내주어 한철을 넉넉히 지냈다고 한다.
이제 스님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염불을 한다. ‘아미타불’을 끝없이 독송한다. 한편으로 신도들을 만나고 포교를 한다. 스님은 “염불을 하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삼매에 들게 된다”고 했다. 흔히들 상근기(上根機)가 참선하고 하근기가 염불하며, 선을 하기 전에 염불을 통해 업장을 소멸해야한다고 하지만 스님은 둘을 구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했다. 서산대사도 ‘염불이 참선이요 참선이 곧 염불’이라고 했다. 스님은 “참선도 좋고 염불도 좋고 경전도 좋고 주력도 좋고 다 좋다”고 했다. 역시 걸림이 없다. 중생들은 선사(禪師)니, 강사(講師)니 하며 구분하지만 스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야말로 ‘그냥 할 뿐’이었다. 열심히 화두 참구하다 30대 후반에 홀연 관응스님 회상에 들어 7년간 경학을 연찬한 것도, 초대 교육원장을 맡아 잠시 행정을 맡게 된 것도, 무문관에 들어간 것도, 영축산 지킴이로 나선 것도, 다시 염불수행을 하고 도심 포교에 나선 것도 모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자재한 도인의 행보다.
“단감에 똘감을 접붙이면 단감이 된다. 8만4000가지 번뇌를 안고 사는 중생도 염불을 하면 부처가 된다. 염불을 통해 부처님의 맑고 깨끗한 뜻이 접목돼 성불에 이르는 것이다.” 염불의 중요성을 일컫는 말이다. 스님은 당신이 손수 쓴 경전 문구를 가리키며 말씀을 이어갔다. “‘아미타불재하방 착득심두절막망’(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아미타불이 어디 있는가, 마음을 잡아두고 간절히 잊지 마라, ‘염도염궁무염처 육문상방자금광’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생각하고 생각해서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면, 육문(六根)에서 항상 금빛 광명이 빛나리라.”
아미타불을 간절히 염원하며 삼매에 빠지면 육근을 청정하게 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마음을 찾는데 있으니 참선이든 염불이든 방법은 다르지 않음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염불이 깨달음의 한 방편임을 강조하는 전통은 은사 경봉스님의 뜻과 상통한다. 경봉스님 역시 염불회를 조직하며 “많고 많은 대해의 중생들은 영접에 모두 환희하리라, 그 기한이 장구하니 광겁에 만나기 어려운 만일의 결사요, 간단하고 쉽고 수승하니 뭇 고통 해탈하는 육자(六字)의 불명(佛名)을 염하는 것이니라”고 했다.
산중을 떠나 도심 한가운데 나온 뜻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부처님 법은 세간 가운데 있다고 했다. 세간을 떠나 불법을 찾는 것은 토끼 뿔을 찾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백척간두 진일보라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원래 선사의 공부가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했으니 영축산의 백련암이나 부산의 백련화사나 선원의 수좌들이나 도심의 중생들이나 스님에게는 한가지다. 그러니 스님의 삶은 엉뚱한 방향전환이 아니라 한결같은 길을 걷는 셈이다.
원산스님은…
1964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69년 통도사에서 경봉스님을 은사로,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범어사, 동화사 전문 강원 수학. 극락선원, 송광사, 봉암사 등에서 20여 년간 수선 안거했다. 39세에 직지사 황악학림에서 관응스님을 모시고 경학을 연찬해 전강했다. 직지사, 통도사 강주와 조계종 초대 교육원장을 역임했다. 통도사 백련정사 무문관 3년 결사 정진하고 2008년 ‘만일 염불회’를 창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