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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세상에 오셨네 [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인연 따라 마음 따라

호선 스님(실상사 화엄학림 연구과정)






한 아이가 있었다. 봄꽃이 만발했던 이맘 때면 엄마와 같이 산길을 오르곤 했다. 어디를 무엇 하러 가는지도 몰랐지만, 그저 엄마와 함께 하는 나들이가 신나기만 했다. 화사한 꽃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절이라고 했다. 어느 해 아이를 놓아두고 엄마 혼자 절에 갔을 때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아이는 이듬해부터 봄향기가 바람에 실려오면 엄마의 움직임을 살펴, 엄마가 절에 갈 때 혼자 남겨지는 일은 없었다. 아이는 자라서 절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 아이가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이다.
그 당시 엄마와 함께 절에 갔던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산길을 수놓은 빛나는 연등과 그 빛에 비친 아름다운 꽃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하나의 이상향처럼 떠오르곤 한다. 가끔 다른 이들로부터 이러한 나의 감정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럴 때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절에 오게 하는 커다란 인연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이성보다 감성이 빠르다고 하는가 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우리 마음도 활짝 핀 꽃과 같이 설렌다. 봄꽃은 다른 계절에 피는 꽃과는 다른 느낌이다. 삭막했던 겨울을 뒤로 하고, 잎보다 먼저 다양한 색깔로 꽃을 피워내며 세상을 순식간에 아름답게 꾸며놓는다. 부처님이 이 아름답고 화려한 봄에 탄생하신 것은 우리에게 분명 축복이다.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느끼는 만큼 우리에게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의 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 전생을 기억하건대, 과거세 오랜 세월 동안 선행을 실천하여 갖가지 훌륭하고 사랑할 만한 과보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비구에게 설명하자 그가 곧바로 진리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초술이라는 사람이 재주가 아주 뛰어나서 온갖 시주를 받고 스승에게 공양하러 가다가, 정광 부처님의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보다 먼저 정광 부처님에게 공양하려고 할 때, 선미라는 여인을 만나 그녀로부터 부부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공양물을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그는 다음 생에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되 애착이 없는 관계를 서원하고, 공양물을 얻어 부처님에게 공양하게 된다. 이런 공덕으로 초술은 정광 부처님에게 석가모니불·여래·등정각이라는 수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부처님의 공통적인 탄생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 두 가지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팔상성도의 내용을 공통적인 부처님 탄생 일화로 다루고 있다. 앞의 두 이야기는 부처님 전생의 내용을 설명함으로써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마지막 경설은 부처님의 탄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부처님이 깨닫기 이전의 삶은 우리와 공통점이 있고, 그 길을 향해 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범부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마음자세를 그 때의 부처님과 비교하면 어떤가. 예를 들면 부처님은 권력(왕위)과 여인(왕비)과 재물(호화생활)을 놓고 출가수행을 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진정 본받으려 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지금 세태는 부처님이 포기한 그것을 향해 달린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재색과 권력을 놓는 것부터가 수행의 기본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일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집착과 포기의 관계에 대해 이원화로 구분 짓기보다는 다원화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기를 당부하고 싶다. 금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것을 담배를 피우는 것과 피우지 않는 것으로 구분하지 말고, 담배를 하나 덜 피우는 만큼 금연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만큼’ 받아들인다면 그것에 대해 그만큼 자유(해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악업을 쉬게 하고 선업을 쌓아가는 수행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 이원화로 구분해 생각한다면 당연히 무리가 따르고, 잘 안 되면 거기서 절망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어쨌든 부처님 탄생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한다. 지금 현실의 불만족을 해결할 방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봄에 싹이 나서 뒤에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희망이 있듯이, 부처님의 탄생도 그 가르침이 싹이 되어 해탈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봄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부처님의 탄생이 어찌 희망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출처 : 월간 불광 06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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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30 /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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