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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절터로의 귀환’ 언제쯤… [학술/문화재] 글자크게글자작게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 전시실에 있는 보원사지 철불좌상. 고려 때인 11세기에 조성됐다.

보원사지 철불좌상


보원사지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가야산에 있는 옛 절터로, 사적 316호로 지정돼 있다. 정확한 창건 연도는 확인돼지 않지만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국보 24호인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있고, 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불상으로 보아 백제 때 창건됐을 가능성이 높다.

11세기 법인국사에 의해 봉안 추정
일제 때 반출 된 후 국립박물관으로


보원사가 언급된 역사적 기록을 보면, 백제 때 창건된 이후 통일신라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찰의 면모를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보조선사창성탑비문에 따르면, 가지산문을 개창한 보조선사 체징스님(804~880)은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서산 가량협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 지역은 또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857~?)이 처음으로 태수를 맡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가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화엄사, 해인사와 더불어 보원사 역시 신라 10산의 10사찰이라고 기록돼 있어 통일신라 때까지 법맥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원사가 대가람으로 번창했던 시기는 고려초 법인국사 탄문스님(900~975)대에 이르러서다. 혜종과 정종대를 거쳐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탄문스님은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가, 974년에 국사(國師)가 됐다. 화엄종의 대가였던 스님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대대적으로 불사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선조 10년(1577)에 발간된 <예수십왕생칠제의찬요>가 보원사에서 간행됐고, 숙종 8년(1682)에 제작된 <동여고비>에 보원사가 표기돼 있어 조선후기까지 전법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음을 시사한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보원사지 철불좌상 역시 화려했던 역사를 대변해준다. 높이 257cm에 가로폭 217cm에 달하는 이 철불은 고려 때인 11세기에 조성됐다. 법인국사승탑비에 보면 광종 1년(949)에 법인국사가 발원해 석가삼존금상을 봉안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조성했던 본존불이라는 견해도 있다.

불상 크기는 크지만, 전체적으로 조형미는 떨어진다. 몸체에 비해 불두가 큰데다가 목이 굵고 어깨는 좁아서 안정감이 떨어진다. 육계는 낮고 넓적하며, 얼굴은 가늘고 긴 눈에 좁은 콧날, 입꼬리는 아래를 향해 처진 것 같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이며, 옷주름이 굵게 묘사돼 있다. 도식화되고 부자연스러운 옷 주름은 고려시대 철불의 특징을 보여준다.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상의 양쪽 손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원사터를 지켜오던 이 거대한 철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1918년 3월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반출 직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봉안됐으며,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 전시실에서 친견할 수 있다.

현재 사찰터는 그 옛날 보원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남아 있다. 보물 102호부터 106호까지 나란히 지정돼 있는 석조와 당간지주, 5층 석탑, 법인국사보승탑, 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이다. 이와 함께 수덕사 말사인 보원사가 철불의 귀한을 기다리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 08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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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7 / 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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