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림사 동림스님은 출가 수행자가 관심갖고 매진할 평생의 불사는 오직 해탈 뿐임을 거듭 강조한다. 스님은 젊은 시절부터 선원을 다니며 화두 참구했다. 동국대 승가학과 1기, 해인강원을 졸업한 종단의 어른이다.
부산 도시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수영천을 따라 해운대로 가는 길 옆에 범어사 말사 해림사(海林寺)가 있다. 해림사 뒷편 장산(山)을 넘어가면 해운대다. 대한제국 시절이던 1894년 창건했다. 처음 보는 절은 웅장했다. 산 중턱까지 들어선 아파트촌을 발 아래 거느려 전망도 뛰어나다. 부산항으로 내달리는 도시고속도로, 동래 시가지, 금정산 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찌는 듯한 더위인데도 스쳐가는 바람이 서늘하다.
“내 마음 고요해지면 그 자체가 해탈”
출가 57년 지나 얻은 것 하나는 ‘이뭣꼬’ 열반적정이 생의 목표요 수행자 가치
8월24일 해림사를 찾아간 날 마침 정자를 만들었다며 주지 동림(東林)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칠순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건강하고 활기찬 몸짓과 말투에다 호방한 웃음이 친근감을 자아냈다.
스님의 이력이 예사롭지 않다. 한국전쟁 당시 당대 최고승들이 모두 모여 수행을 하던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모시고 출가했다. 전쟁 직후 운허스님이 통도사에서 강원을 열었을 때 학승으로 경전을 배웠다.
운허스님이 해인사로 옮겨 가자 함께 해인사로 갔다. 해인총림 율주 종진스님, 전 해인사 주지 보광스님, 동국대 교수 법혜스님, 포교원장 혜총스님 등과 함께 해인강원 4기로 현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강주로 모시고 경을 배웠다.
강원을 마치고 동국대 승가학과 1기생으로 입교했다. 이후 선원 수좌로 전국 선원을 다니며 선지식을 모시고 가행정진했다. 성철스님이 철조망을 걷고 나온 뒤 바로 파계사 성전암을 찾아 화두 참구했으며, 정영스님이 도봉산 천축사에 무문관을 열자 1년 결사에 동참했다. 통도사에서 철웅스님 우룡스님 등과 함께 경봉스님을 모시고 공부했으며 향곡스님 회상에도 머물렀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총무원장을 두 차례 역임한 영암스님도 5년 모시며 행정을 도왔다. 출가 본사인 부산 선암사 주지를 하며 부산불교회관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력으로만 치면 중앙종회의원 몇 차례 역임하고 총무원장을 거쳐 지금쯤 원로의원으로 지내며 ‘큰스님’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스님은 그냥 수좌로 불리기를 원한다. 영암스님이 총무원장 시절 몇 차례 도와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해탈 밖에 할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독경소리만 잔잔하게 울려퍼지고 산사는 적막하다. 40, 50년 전을 회상하는 스님의 눈빛이 형형하다.
그런데 다 부질없다고 한다. “내 나이 70을 맞아 이제 내일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때를 맞아 보니 내 일이 제일 급하다. 출가의 근본목적은 오직 하나 생사해탈 뿐이다. 그 모든 욕심, 영광도 명예도 모두 부질없다. 오직 해탈 뿐이다. 지금 그것 하나만이 절실하고 급할 뿐이다.
불교 역시 사회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가 불교에 바라는 점도 있고 불교 역시 사회를 위해 기여해야한다고 하지만 내가 빛이 나면 저절로 비추게 된다. 따라서 출가자는 현실에 얽매이면 안된다. 내 정신 맑게 하려면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출가자의 시비(是非)라는 것은 ‘그슬린 돼지가 달아맨 돼지 나무라는 꼴’일 뿐이다. 빨리 가는 사람은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사람은 늦게 가는 등 자기 능력에 맞게 가지만 결국 해탈에 이르는 길은 같다.” 스님의 법문이 계속된다. “무슨 말을 해도 중의 기본은 생사 해탈이다.
금생에 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불퇴전의 자세로 공부해야한다. 사람이 살면서 인연을 맺고 이렇게 저렇게 사는 것은 모두 윤회의 세계이지 해탈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소중하게 보이겠지만 나이 들면 해탈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해탈이란 무엇이냐. 내 마음 고요하고 맑은 그 자리다. 적정, 적멸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한다.
이해와 차별에 얽매이고 경쟁을 하면 고뇌 속에 사는 것이고 내 마음이 고요해지면 그 자체가 해탈이다.” 스님은 신도들을 위해서는 참된 자비사상 실천을 강조했다. “
신도들은 무상보시가 복짓는 일임을 알아야한다. 복을 짓더라도 지혜가 있어야 참보시다. 장사보시는 안된다. 내가 욕심 내면서 신도들에게 욕심을 내지 마라 하면 안된다. 내가 실천해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온다.
복은 우주에서 오는 비 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자기가 담을 수 있는 그릇 만큼만 받는다. 가게를 하는 신도집에 가면 기분이 좋게 풍족하게 산다. 가게 주인도 이익을 얻어야 할 것 아닌가. 가게 주인도 마찬가지다.
손님 기쁘게 풍족하고 맛있게 해주면 손님이 더 많이 온다. 혼자를 위하면 가지는게 적어진다. 열사람 백사람을 위하면 그만큼 많아진다. 그게 바로 부처님 자비사상이다.
불교라는게 무엇인가. 모든 악 짓지 않고(諸惡莫作) 선을 받들어 행하고(衆善奉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닦으면(自淨其意) 그것이 곧 불교 아닌가.” 법문은 계속 이어졌다. “정말 나에게 보배가 하나 있는데 바로 부처님 해탈법이다. 출가한지 57년이 지나 얻은 것이 있다면 ‘이뭐꼬’ 하나다. 그런데 그 속에 다 들어있다. 그 속에 생사열반이 들어있다.
신도들도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하나만 지니고 독송하면 다 된다. 이뭐꼬 하는 마음이 참마음이다. 이는 방(房)과 같다. 누구에게나 방은 아늑하고 따뜻하다. 그처럼 염불이든 간경이든 참선이든 자기 방(房) 하나만 가지면 된다. 화두는 인생을 여는 열쇠다. 제일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주신 분이 전강스님이었다. 내가 정진 과정을 말씀 드렸더니 스님 말씀이, 잣나무에 잣 잎 줄기 기둥 다 있지만 잣 맛이 제일이듯이 정진의 힘은 적정이다 하시더라. 적적요요 무일사하니 / 단간심불 자귀의(寂寂寥寥 無一事 / 但看心佛 自歸依)라, 적적하고 고요할뿐 한 가지 일조차 없으니 다만 안으로 마음 살펴 자성불에 스스로 귀의할 일 밖에 더 있던가.”
스님은 오직 열반 적정만이 생의 유일 목표며 수행자에게 더 이상 가치는 없다는 말을 거듭했다. 수행 이력에서 보듯 스님은 마음만 먹으면 종단의 중요 직책도 챙길 수 있었다. 실제로 스님들이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님은 단호하게 뿌리쳤다. 법당 주인 따로 있고 사무실 주인 따로 있으며 지킬 자 따로 있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다. 용기와 지혜 덕은 따로 놀지 않지만 자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스님의 별명은 즉설주왈((卽設呪曰)이다.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 직언을 서슴치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앞뒤를 따져보거나 곰곰이 생각하면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말이다. 하지만 즉각 반응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직설적인 수좌 기질이 그대로 묻어나는 화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날뛰는게 병이고, 자랄 때는 욕심이 병이 되며, 나이 들어서는 외로움이 병이다. 이를 잘 다스려야 죽을 때 후회가 없다. 사는 일이 큰일인 줄 알지만 아니다.
욕심으로 죽음을 면하려고 해도 허사다. 오직 생사대사임을 깨닫는 것 하나만 있을 뿐이다. 명심하라. 부처님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내가 부처라는 믿음을 갖고 부처 자격으로 살아가야한다. 내가 부처가 되어야 남에게 줄 것도 생긴다. 부처님에게도 의지말고 스님에게도 의지말고 오직 자기를 의지해라.”
스님은 끝으로 이렇게 말을 맺었다. “행자상념 안광낙지 대해탈자 기무유야(行者常念 眼光落地 對解脫者 其無誰也)”라. 죽을 때 생각하면 오직 할 것은 해탈 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스님이 거처하는 처소 성적당(惺寂堂)에 한 여름 붉은 노을이 드리우고 있었다.
동림스님은…
1940년 부산 장산 아래 무정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해림사가 있는 바로 그 곳이다. 조모가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다 어느 걸승의 관음기도 권유로 쾌차했다. 불은에 보답하기 위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임야 1만평을 사 암자를 짓고 무화사(舞華寺)라고 했다. 해림사 전신이다. 둘째 아들이 대처승이 되었는데 그의 다섯째 아들이 바로 동림스님이다.
스님은 부친이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법사’로 불렀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전쟁을 피해 부산에 온 신흥불교집단에 가입했다가 16세에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통도사 강원,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선암사 통도사 극락암, 파계사 성전암, 기장 척판암, 도봉산 천축사 등 제방 선원에서 가행정진했다. 1980년 부산 선암사 주지를 역임하고 1988년부터 해림사에 주석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