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이제 더 이상 ‘깨달음’이라는 말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그에 관한 온갖 행법 또한 소수 수행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하나의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무엇을 깨달으라는 것인가?”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화두로 나온 평론집 불교학에 대한 회고 · 삶의 철학 등 담아내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평론집 <불교학과 불교>에서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를 화두로 던지면서 이같이 일갈했다. 권 교수는 “단언하건대 이론만을 중시하는 불교는 없다”며 “선(禪)은 통찰의 지혜를 드러내는 통로”라고 정의했다. “초기불교 이래 통찰의 지혜는 언제나 계율과 명상에 수반되는 것이었다. 계율(戒)과 명상(定)과 지혜(慧)는 해탈의 세 축이었으며, 명상(止)과 통찰(觀)은 언제나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찰의 대상은 학파나 시대에 따라 한결같지 않았으며, 따라서 선이 오로지 ‘이 뭣고’의 간화선만을 가리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무엇을 통찰할 것인가에 따라 선의 방법도 목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에 권 교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님을 역설했다고 밝혔다. 혹자는 그럴 경우 “불교는 독립된 종교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불교는 독립된 종교로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란 게 권 교수의 생각이다.
<사진>불교학 연구에 30여 년간 매진해온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이론만을 중시하는 불교는 없다”며 “선(禪)은 통찰의 지혜를 드러내는 통로”라고 정의했다. 사진은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큰방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책은 오로지 믿음에 기초한 불교학에 대한 비판도 무성하다. 저자는 “알음알이 운운하며 불교학을 불교의 아류쯤으로 치부하는, 그리고 불교학자마저 그러한 불교학 인식에 순응하는 것을 보며 이제 바야흐로 팔만대장경의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불교가 펼쳐질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며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권위에 의탁한 채 전면적이면서도 정치한 선인(先人)들의 논의를 단편적으로 거칠게 재구성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책은 이외에도 ‘우리나라 인도불교학의 반성적 회고’에서 1992년 초반까지의 인도불교학 연구성과는 다만 한국불교와 중국불교를 논하기 위한 서론적 의미에 지나지 않음을 개탄했다. 또한 인도불교사에 관한 한 선진(일본)학계의 새로운 학설을 사의에 맞게 수용할 만한, 비판적으로 검토할 만한 학적 토대조차 마련되지 않았음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탓했다. 아무런 비판적 반성 없이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법이라고 되뇌이면서 이를 세상만사에 적용시키는 획일적 사유에 대해서도 고찰했다. 책은 이처럼 불교학에 대한 저자의 회고와 전망, 삶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