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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하는 세상’ 이사장 지 성 스님 [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진실된 마음으로 사람 대하면 길 보인다”

지성스님은 제9교구본사 동화사 주지를 역임하고 현재 칠곡 극락사의 상좌 스님 절에서 조용히 지낸다. 하지만 스님의 큰 원력은 몽골 미얀마 스리랑카 등 다른 불교국가 불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성스님은…

1940년 경남 진주 출생. 1958년 동화사 입산. 1959년 동화사에서 혜진스님을 은사로, 인곡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청송 대전사, 영천 은해사, 용연사, 송림사, 동화사 주지 역임. 제 10대, 11대 중앙종회의원 역임. 사단법인 ‘함께하는 세상’, 보현신용협동조합 이사장.

어느 해 중국 취재 현장에서 만났던 한 한국인 사업가 부부가 동화사 주지를 역임한 지성스님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한.몽불교교류협회를 만들어 몽골을 돕는다는 이야기도 그 때 들었다.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린 것은 스님이 몽골을 방문한다는 기사였다. 스님에 관한 자료를 다시 살폈다. 동화사 주지직을 내놓을 무렵 천주교 이문희 대주교가 동화사를 방문한 이야기에다 ‘함께하는 세상’ 창립, 몽골 불교 지원 등의 기사가 스님 이름으로 나왔다. 재임시 <백고좌 법회> <화엄논강> <담선법회> <계율수행법회> 등 새로운 방식의 법회를 선보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했던 사실과 겹쳐졌다.

스님은 만남을 흔쾌히 수락했다.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전해졌다. 지난 1일 동대구 역에서 내려 칠곡으로 향했다. 대구와 한 시간 거리지만 버스가 다니지 않는 오지였다. 한국 전쟁 때 대구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다부동이 스님이 주석하는 극락사 바로 뒤편이다. 극락사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사찰 뒤 산은 화재로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스님이 거처하는 요사채 앞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했다. 스님이 직접 다과와 음료수를 내오며 “주지 스님이 불사를 하느라 아주 고생한다”며 “신도도 없고 대구에서도 먼 이곳에서 불사를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주지스님이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답게 살자’가 내 인생관
주지는 주지답게 토굴생활은 토굴생활 답게,
주지할 때는 누구나 만날 수 있어야 하지만
토굴생활하면 자기 공부에 ‘매진’


며칠 뒤 떠날 몽골과 인연을 들려주었다. 동화사 주지로 재임하던 2003년 대구에서 열린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한 몽골 선수단이 동화사를 방문해 도움을 요청했다. 스님은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 때 인연을 계기로 한 몽골 불교교류협회를 만들어 후원을 이어갔다. 몽골 최대 사원인 간단사에서는 울란바트로에 한국인 선교사가 대거 들어와 최신식 유치원을 세워 몽골 부유층 자제들을 흡수하고 신문을 만들어 기독교를 전파한다며 지성스님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스님은 “3300여평 규모 대지위에 유치원을 지었는데 다음 주 준공식을 한다”고 말했다. 동화사 주지를 내놓은 뒤에도 스님은 개인적으로 후원을 계속해 불사가 완성된 것이다.

스님은 몽골 불교계와 인연을 계기로 미얀마 스리랑카 등 다른 불교국가로 후원을 확산했다. 한.몽불교교류협회도 ‘함께하는 세상’으로 확대했다. 이 단체는 국제구호 역할을 한다. 대구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는 한국 몽골 스리랑카 세 나라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함께하는 세상’은 동남아에서 온 근로자들을 돕는다. 직장을 알선해주고 인권 침해를 받으면 법률 구조를 해준다. 다치면 치료해주고 실직해서 갈 곳이 없으면 편히 머물게 한다. 성지순례도 데려가 한국문화를 알게 해준다.

대구에서 스님이 일군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대구불교대학이며 다른 하나는 보현신용협동조합이다. 대구불교대학은 1992년, 보현신협은 1990년 만들었다. 1983년 은해사 주지 재임시 대구 지역 사설사암에 대응해 공찰 주지들로 구성된 ‘팔공승가회’를 만들었다. 스님은 “승가회에서 해마다 합동방생을 갔는데 한번에 2000~3000만원이 남았다. 몇 년 지나지 않아 1억원이 모였다” 스님은 이 돈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 불교대학을 설립키로 했다. 스님은 “신도들이 낸 돈이니 신도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은 방안이 교리 강좌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까지만해도 불교대학은 전무한 시절이었다. 스님은 “대학을 어떻게 만들고 운영하는 지를 몰라 전국을 다니며 찾았다. 서울 대원불교대학과 전주에 전북불교대학 두 곳이 있었다. 대원불교대를 참고해 대구불교대학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졸업 동문만 3000여 명에 이르는 전국을 대표하는 불교대학으로 자리잡았다.

은해사에서 대구 용연사로 자리를 옮긴 스님은 한 스님의 조언을 들어 신협을 만들었다. 스님과 신도들이 ‘스님이 사채놀이 한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스님은 ‘만인이 한 사람을 위하고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하는 것이 신협 정신’이라며 설득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신협을 꾸렸다. 스님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불자 택시기사들의 신행모임으로 만들었던, ‘개인택시정법회’ 회원들이 신협의 주 회원이 됐다. 현재 보현신협은 자산 400여억원, 고정 회원 7000~8000명에 이르는 중진급 모범 신협으로 자리 잡았다. 지성스님은 신협 이사장을 맡고 있다. “무리하지 않고 정도를 지킨 결과 탄탄한 재정구조를 갖추게 됐다”며 “자산이 1000억원을 넘으면 사찰 대형불사도 지원할 수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는 곳 마다 새로운 역사를 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스님은 “무상(無常) 공(空) 무(無)를 말하는 뜻은 집착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 진정한 의미는 실상을 바로 보라는 뜻이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실제이지(實際理地)에는 불수일진(不受一塵)이나 불사문중(佛事門中)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했다. ‘실질적인 진리자리에는 먼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부처님 일 즉 불사에서는 한 법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고 했다. 하는 일마다 불공을 드리는 마음으로 정성과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오고 부처님 일을 해왔다”고 말했다.

즉 스님은 있는 그대로를 하나도 허투로 대하지 않고 적극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듯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몽골 선수들이 동화사를 방문했을 때 약간의 돈을 후원하고 돌려보냈을 수 있다. 대회가 끝난 뒤 모른체 할 수도 있었다. 동화사 주지직을 물러 나와서는 동화사 주지 자격으로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내일이 아니라며 외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님은 그들의 말을 가슴으로 듣고 한번 맺은 인연은 끝내 놓지 않았다. 보현신협도 대구불교대학도 함께하는 세상도 그런 마음이 작용해 하찮게 끝날 수도 있었을 일이 크고 넓게 퍼졌다. 스님은 그 일이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진실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사람을 대하면 자연스럽게 길이 보이고 마음이 가게 된다.”

스님의 마음 씀씀이는 행자시절부터 선지식들을 만나 배우고 일념으로 공부해 쌓은 결과다. 우연히 들른 진주의 응석사에서 총무원장을 역임한 의현이 “자신을 모르고 살면 인간은 우주의 나그네가 되고, 내가 자신을 깨달아 알면 우주의 주인이 된다”는 가르침에 이끌려 동화사로 출가했다. 행자인데도 불구하고 금당선원 입승 스님으로 있던 지월(指月)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매일 저녁 두세 시간씩 정진할 수 있었다. 통합종단 종정을 지낸 설석우 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금강경> <육조단경>을 배웠다. 1년의 행자생활을 끝내고 동화사에서 인곡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서로 만난 적이 없는 혜진스님을 은사로 정했다. 은사스님이 계신 울진 불영사로 갔다. 금담스님 비룡스님 등 세 분이 겨울 내내 장좌불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공양주를 했는데 스님들의 용맹정진을 보고 한시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 후 깊은 산중 토굴에서 결제와 해제가 따로 없는 수행의 날들을 보냈다. 5년이 넘는 토굴생활을 마치고 대구 지역 사찰에서 소임을 살고 2002년 동화사 주지로 마지막 회향을 했다. “생각하는 주지가 되기로 했다. 임기 동안 많은 불사를 하고 <백고좌 법회> <화엄논강> <담선법회> <계율수행법회>를 열어 새로운 법회상을 선보이는 등 최선을 다해 소임을 살았다. 이전까지 고승법문이 주제도 없이 법상에 올라가 일방적인 법문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주제발표를 하고 토론자들도 충분히 반론을 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법회를 개최했는데 2500년 전 부처님 당시 영산회상에서 1200명의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한 분위기가 이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진지하게 법을 논했다”고 회고했다.

“ ‘~답게 살자’가 인생관이라면 인생관이다. 주지는 주지답게, 토굴생활하면 토굴생활 답게, 주지할 때는 누구나 만날 수 있어야 하지만 토굴생활하면 신도들과 접촉을 끊고 자기 공부에 매진하고.”

‘언행일치.’ 떠나는 뒷편에서 웃으며 합장하는 스님을 보며 떠오른 단어다.


<출처 : 불교신문 09월 0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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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8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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