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도인으로 불리는 금종스님은 늘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
부산 서구 암남동은 부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절경이다. 이곳에 1900년대에 창건한 해광사가 있다. 해광사 뒤로는 천마산이 앞으로는 부산 감천항이 보이는 길지다. 이곳에 20여 년 째 주석하고 있는 금종 종권 스님이 찾아오는 신도들을 만나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쉽게 전하기 위해 대중에게 다가가는 스님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겐 위로를” 말한다. 지난 9일 부산에서 금종스님을 만났다.
“욕심 버리고 남 위할 때 잘살 수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위로가 필요한 이에겐 위로를” 당대 최고의 선지식 모시고 공부한 ‘지리산 천진도인’
부산 해광사 금종스님은 ‘지리산의 천진도인’으로 불린다. 금종스님은 지리산 반야봉의 묘향대 토굴에서 3년, 노고단 문수대 토굴에서 3년, 광양 상백운암에서 3년 등 모두 9년을 토굴에서 결사했다. 토굴에서 홀로 가행정진만 한 것이 아니다. 당대 최고승을 대부분 모시고 공부를 했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금종스님은 깨달음을 얻겠다며 당대 선지식들을 모시고 공부하며 가르침을 얻었다. 남방 제일이라던 양산 통도사 경봉 스님과 북방 제일이라던 인천 용화사 조실 전강스님을 비롯, 합천 해인사 성철스님, 순천 송광사 구산스님, 나주 다보사 우화스님, 장성 백양사 서옹스님, 의정부 망월사 춘성스님, 부산 묘관음사 향곡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두루 친견했다.
그러나 선지식들 밑에서 한 철씩 공부를 했으나 갑갑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선요>를 보다가 중국의 고봉스님이 쓴 글에 눈길이 쏠렸다. “수행자가 공부를 하고 싶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5가지 조항을 지키면서 수행을 하되 3년이 되어도 성불을 못하면 내 거짓말한 죄로 발설지옥에 빠질 것이다.”
스님은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내 나이 스물 다섯에 스승님을 모시고 지리산 화엄사에서 소임을 살았는데 나는 내 공부가 하고 싶어 조르고 졸라서 토굴에서 수행 정진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반야봉 쪽으로 3km 더 들어가는 곳에 있는 문수대로 갔다. 그곳에서 고봉스님이 l말한 5가지 조항을 붙여놓고 홀로 3년 결사에 들어갔다. 3시간 이상 자지 말 것, 3홉 이상 먹지 말 것, 일체 문학을 멀리할 것, 일체 말을 하지 말 것, 산문출입을 금할 것. 무슨 일이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3년 동안 생사를 건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산속의 나무와 열매를 채취해 먹으며 산속의 짐승 온갖 풀들과 벗하며 정진했다.”
3년 결사를 마친 뒤 스님은 다시 반야봉에서 4km 가량 떨어진 묘향대로 옮겨 다시 3년간 정진했다. 묘향대에서는 태안사의 종안스님과 종수스님과 한해를 나기도 했다. 절반 쯤 지났을 무렵에는 속가 부친이 혼수 상태에 빠져 행자들이 모시러 왔지만 세 번이나 거절할 정도로 철저하게 공부했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여겨 송광사 구산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구산스님은 자신이 공부해서 득력했던 광양의 백운산 상백운암 토굴을 일러주었다. 스님은 다시 3년 결사에 들어가 마침내 마음의 안식처를 얻었다.
스님이 공부하는 동안 은사 스님의 득력처를 찾아온 현호스님, 법정스님이 당시 정진하던 금종스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스님의 수행이력을 담은 자전적 수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표지 사진이다. 스님은 9년 결사 끝에 얻은 결실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그 경지는 경험을 통해 아는 사람들 만이 아는 이야기”라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스님은 9년 결사를 끝낸 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 전까지 스님은 말주변이 없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면 주눅이 들고 얼굴이 붉어지곤 했지만 모두 사라졌다. 오히려 종지(宗旨)에 밝고 설법에 능통해졌다. 무엇보다 고행을 끝낸 스님은 중생들에게 회향을 했다. 경찰서, 구치소, 재소자 등 사회의 어두운 곳을 찾아 설법했다. 부산구치소에서 재소자들에게 법문을 해준 인연으로 지난 20여 년간 교도소를 찾아다녔다.
광주소년원 원생 30여 명을 초청해 공양을 대접하기도 하고, 순천교도소나 경찰서, 유치장 등을 찾아 위문했다. 스님의 설법이 인기를 얻으면서 부산 불교방송 프로그램 진행도 맡은 바 있다. 자갈치 시장 보살들, 택시운전기사, 공장에서 일하던 일꾼들로부터 감사의 인사가 쇄도할 정도였다. 스님의 법문은 딱딱하지 않고 재미가 있어 지금도 인기가 많다. 스님은 “누구나 듣고 쉽게 젖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법문”이라고 말했다.
금종스님은 늘 어린아이와 같은 해맑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누구나 평등하게 대한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지리산 천진도인’이다. 지리산 천은사 주지 시절에는 주지임을 감추고 찾아오는 신도 관광객들에게 직접 천은사와 지리산을 안내하고 차도 대접했다. 누구나 평등하게 대하고 서스럼없는 스님의 수행자 관을 그대로 실천 한 것이다. 스님은 “내 말 한마디 듣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 누구나 만나야지. 사람들 만나 부처님 가르침 전해주고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수행자의 도리”라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한 누나를 따라 출가한 금종스님은 대둔산 태고사에서 조계종 원로의장인 종산스님과 만나고 이어 은사이신 도광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도광스님을 따라 담양 보광선원으로 가 수계를 받고 정식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해 “은사스님은 엄하고 검소한 스승이었다. 설거지하다 밥알 하나라도 나오면 물에 씻어 주워 먹어야 했다. 밥알이 많이 나오면 국에 넣어 끓여 먹었다. 누가 소포를 보내오면 물건 싼 끈을 칼로 끊어내는 법이 없이 조심스레 풀어 모아두었다가 다시 사용하였고, 종이는 곱게 접어두었다가 뒤집어 사용하곤 하였다. 보고 자란 것이 그러한 모습인지라 스님 역시 검소함이 몸에 배어 노끈 하나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은사스님 역시 금종스님을 특별히 아껴주었다. 스님은 “ 은사스님께서는 ‘종권아, 천 사람이 천 가지 말을 하고 만 사람이 만 가지 말을 해도 너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일체 다른 마음먹지 말고 무명을 밝히는 데 힘 쓰거라. 알겠느냐’며 용기를 주셨다”고 말했다.
스님은 줄곧 화두 참선을 한 수좌이지만 신도들에게는 기도를 강조한다. “짐을 가득 실은 차가 언덕을 못올라 가듯 업장을 지닌 중생은 성불을 할 수없다. 우선 기도를 통해 업장을 소멸해야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할 때 진정 잘 살 수있다”며 “남을 위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정치인들을 향해서도 “남 비판하는 소리 쓴 소리만 할 것이 아니라 칭찬하고 추켜 세우면 더 좋은 나라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출처 : 불교신문 09월 012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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