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여열반을 아난존자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자, 땅이 크게 진동하더니 천둥이 울렸다. 사라쌍수에 때 아닌 꽃이 만개하고, 하늘의 만다라화가 여래를 공양하기 위해 허공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만월의 달빛이 환히 내리비치는 한밤중에 만다라화가 춤추듯 허공에서 하늘거리며 내려온 그 날의 정경을 광주 향림사의 와불(臥佛)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천의에 내려앉은 꽃잎들, 반개하신 눈 아래 적정(寂靜)의 안온한 미소를 띤 열반 상 앞에 서니 부처님께서 이천오백 년 전에 열반하신 것이 아니라 방금 전에 열반에 드신 것처럼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천운 스님께서는 작년에 부처님의 열반상을 모시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스님의 원력대로 불사는 원만히 진행돼왔고 올 유월에 와불 점안법회를 봉행했다.
“열반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 있어요. 유여(有餘)열반은 탐욕이나 어리석음 등과 같은 모든 번뇌망상이 제거될 때 증득하게 되는 열반인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증득하셨을 때 도달하신 열반을 가리키지요. 세존께서는 입멸(入滅)하실 때 육신과 정신적인 작용이 완전히 해소됐으므로 무여(無餘)열반에 드신 것입니다. 초기 경전에서는 탐진치(貪瞋癡)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열반이라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열반은 죽고 나서 증득하게 되는 어떤 경지’로 오해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지요. 열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바로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죽어서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 참으로 존귀하다. 스님은 이어서 ‘탐진치 삼독이 소멸돼서 항상 자비희사가 넘쳐흐르고 지혜가 충만한 가운데 환희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중생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삶이 바로 열반의 참모습’임을 강조했다.
올해 세수 팔십이신 천운 스님은 거동이 많이 불편하시다고 했지만, 눈빛은 새벽별처럼 빛났다. 스님의 건강을 걱정했더니 “부처님께서는 일대사인연으로 오셔가지고 생로병사를 다 보여주고 가셨다”라고 짧게 한마디 했다. 스님은 평생 동안 해 오신 그대로 새벽 4시면 일어나 예불올리고, 두 시간 동안 참선하고 염불하신다. 요즈음 일과가 하루 종일 참선하고 염불하니 건강이 허락할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이 수행정진하고 있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라면서 환하게 웃었다.
스님이 열넷 살 때, 속가 아버지는 학명 스님을 받들어 수행했는데, 그때부터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금강경>을 열심히 독송했다. 그런 인연으로 <금강경> 독송을 평생의 수행으로 삼게 됐으며, 20세 전에 <금강경>을 다 암송할 수 있었다. <금강경>과의 특별한 인연은 월정사에서 지암 스님을 만나면서 더 두텁게 이뤄졌다.
“<금강경>은 대승시교이기에 참으로 중요하며,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수승한 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면 성불한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어요. 금강경은 공(空)의 원리와 실천을 가르치고 있는 경이지요. 그리고 번뇌를 떨쳐버린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인 지암 스님은 하루에 <금강경>을 네 번씩 독송하셨는데, 외출하실 때에도 경을 보자기에 싸서 품에 지니고 다니실 정도였다. 버스나 기차 속에서 또는 길을 가는 도중에도 시간에 맞춰 독송하셨다. 향림사의 가풍은 참선과 <금강경>독송인데, 지암 스님의 수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지암 스님께서 실천해 보이신 그 진지함과 엄숙함은 그 자체로 신앙이요, 수행이었다”고 덧붙였다. 천운 스님은 평생의 <금강경>독송을 회향하는 의미로 최근에 <금강반야바라밀다경> 강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논리적이며 선적(禪的) 지혜가 번뜩일 뿐 아니라, 여러 경전과 불교 전반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책이다. 스님의 평생의 수행도 엿볼 수 있다.
천운 스님께서 금강경 32분(三十二分)중 가장 귀하게 새기는 것은 제5분(五分)에 나오는 사구게(四句偈)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존재하는 바의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측면에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부처님께서 32대인상(三十二大人相)을 구족하셨다는 사실에 당시의 불교도들은 지나치게 감동하고 있었으므로 부처님께서 어리석은 중생들이 32인상에 현혹돼 법신불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할 것을 크게 염려하신 것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32상은 수행의 결실로 얻어진 육신의 한 모습일 텐데, 그것으로 여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는 없음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32상을 구족한 것으로 여래를 본다면 이는 다 허망한 것이지만, 32상을 구족하지 아니한 면에서 본다면 이는 허망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상(相)이란 것은 기만(欺瞞)적인 것이니 상 아닌 것으로 보아야 진실한 절대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천운 스님은 출가수행자로서 불조의 뜻을 받들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그대로 실천해 오신 분이다. 안으로 끊임없는 정진을 밖으로는 복지 원력을 세워 쉼 없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계시기에 참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광주 향림사를 중심으로 해 사회복지 법인 향림원을 설립해 어린이집, 유치원, 불교대학, 장애인 복지관, 노인복지관, 신용협동조합, 출판사 등 10여 개의 복지관련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스님은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키워 사회로 배출한 보살의 삶을 살아오셨기에 수행승이란 이름 위에 ‘고아들의 대부’라는 이름 하나를 더 얻게 됐다. 육이오전쟁으로 많은 고아들이 생겨났으며, 타종교시설을 통해 외국으로 입양돼가는 아이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것이 가슴 아파 하나, 둘 돌보기 시작한 것으로 스님의 손을 거쳐 간 아이는 200명이 넘는다. 그중 출가해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이십여 명에 이른다.
“우리 아이들의 하루는 다섯 시 아침 예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예외이고요. 예불 후 아침 공양 전에 한문 열 자씩을 가르치고 나서, 아침 공양 후에 책가방을 챙겨서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내가 몸소 승차권을 나누어 주면서 ‘차조심, 오락실조심, 공부 잘하라’고 일일이 당부를 했어요.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반복되는 이런 일들을 보고 나의 도반이나 신도들은 참으로 어지간하다고 했지만, 아이들에게 사랑을 심어주는 나만의 사랑법이지요. 내가 그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육체의 성장과 함께 정신적인 자양분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도 향림사에 맡겨지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완전한 고아는 없고 문제 있는 부모에 의해 방기돼 만들어진 고아들이 대부분”이라면서 인륜마저 함부로 끊어버리는 몰인정한 사회문제를 꼬집었다.
“나에게 맡겨진 아이들의 문제는 결코 나와 그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지혜롭지 못하고 나쁜 습관을 익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모두가 짓고 모두가 받는 공업(共業)입니다. 우리 모두는 청정심을 회복해 모든 인류를 내 몸처럼 생각하는 동체대비 정신을 익혀야 합니다.”
스님은 ‘네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연기법은 만고불변의 진리이기에 남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되고, 남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된다’고 했다.
아이들에 대한 스님의 교육열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도망가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공부를 시켜주었다. 박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해 주었고, 유학을 원하면 유학도 보내주었다. 사회 곳곳에서 교사, 의사, 사업가 등 제 몫을 다하고 있다면서 “박사도 여럿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보현보살이 현현하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아이들의 학비를 조달하려면 참으로 힘들었을 것 같다고 했더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냥 저절로 다 되더라고요.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피지요.”라고 하셨다.
스님에게는 일평생 배움을 주신 박한영 스님, 지암 스님, 서옹 스님 세 분의 스승이 계신다. 근대의 대선지식이었던 그 분들의 은혜를 평생 잊어 본 일이 없으며, 해남 대흥사에 세 분의 부도탑을 세웠다.
“박한영 스님에게서는 부처님의 따스한 자비심이 무엇인지 배웠고, 지암 스님에게서는 이판과 사판을 다 배웠어요. 지암 스님은 종로구의 조계사를 건립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총무원 중심체제로 종헌종법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리고 각처에 포교당 건립과 유치원 건립 등 불교의 현대화에 노력하셨어요. 저는 지암 스님으로부터 무(無)자 화두를 받아 참선수행을 하게 됐으며, 포교에 뛰어든 것도 은사님께서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니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본뜻을 신도들에게 실천하고 너희들 스스로 모범을 보여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유훈 때문이지요.”
도솔암에서 대교과를 비롯해 내전과 외전을 두루 공부했다. 선암사에서 강사로 와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곳에서 9년 남짓 강사생활을 하다가 선방으로 돌면서 참선을 했다. 조계산 토굴, 도갑사, 대흥사, 선운사 선원을 전전하며 10여년간 참선을 했다. 목에 묵언패를 걸고 몇 년 동안 묵언정진을 한 것이다. 천운 스님의 이런 치열한 정진이 오늘의 스님을 있게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암 스님은 일제치하의 살벌한 상항에서 겉으로는 친일하는 척했지만 실은 독립자금을 많이 대신 분입니다. 상해 임시정부 김구선생의 요청에 의해 임시정부 수송사령관의 중책을 수행하시면서도 조금도 임시정부의 요원이라거나 독립운동가라는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이 이를 오해해 친일 승려로 매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어요.”
‘차별 없는 참사람’의 세계를 구현하신 서옹 스님은 “승려는 부처님의 계율에 일치되는 생활을 해야 하며, 증득한 깨달음이 있다면 중생들에게 회향될 수 있도록 육바라밀을 실천하라”고 간곡히 당부하셨다. 지계사상이 투철했던 서옹 스님은 지계정신을 계승해 줄 것을 당부하시면서 천운스님께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전법게 중 일부인 다음의 송(誦)은 천운 스님 일생의 수행송이 됐다.
벽해심저니우규(碧海深底泥牛규) 홍염경중목마시(紅焰暻中木馬嘶) 푸른 바다 깊은 밑바닥에서 진흙소가 울부짖고, 붉은 불빛이 환히 밝은 가운데 목마가 흐느껴 우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술 먹는 것, 담배 피는 것, 화투치는 것, 약으로 먹는 것은 모르지만 고기 먹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면 승려가 아니지요. 상좌들에게 그런 짓 하면 나와의 인연은 끝이다 그래요. 계(戒)는 흔히 그릇에 비유되잖아요.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그릇이 깨어져 있으면 물을 담을 수가 없듯이, 계율을 지키는 것은 튼튼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계행을 잘 지킬 줄 아는 사람은 안정을 속히 얻어 혜가 밝아져요. 그릇이 온전해야 물이 차고, 물이 맑아야 달을 볼 수 있지요.”
불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부탁드렸더니, <금강경> 한 구절을 일러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선법(善法)을 행함으로서 철저히 깨닫게 된다’고 했어요. 선법이란 수행하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선법이 우리들 일상의 생활에도 반영돼야 진정한 선법이라 믿어요. 모든 사람들이 환희심을 낼 수 있는 언행을 실천하는 것이 선법이며, 자신의 이익에 앞서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말과 행동이 선법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선법이라 설했지만, 그것은 이름이 선법일 뿐’이라 했어요. 범부들은 조그만 선행을 하고서도 내가 지금 선(善)을 행하고 있다는 아상을 잔뜩 갖게 되는데 부처님이 계시는 절에 와서 그런 아상을 부리면 안 되지요.”
선을 행하되 아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스님은 지극히 겸손한 마음이 이타심(利他心)이라 했다. 남을 위한 이타행을 통해서만 자신의 교만심과 아집을 떨쳐낼 수 있단다.
매일 아침에 단 몇 분간만이라도 앉아 호흡을 세면서 명상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자신을 이 우주의 주인공으로 확립시키는 일이 된단다. 이 천지간에 눈을 감는 날까지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들숨날숨을 반복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서 살다보니 호흡하는 주체를 잊어버린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해 좌복 위에 앉아 볼일이다. 이 넓은 우주에서 한 숨 들이 쉬고 내 쉬는 이 존재의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은 내가 바로 우주의 주인공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주 공간에서 내가 주인 노릇을 하는데 끄달릴 것이 무엇 하나 있겠는가? 그대로가 날마다 좋은 날이요 기쁨이 되는 것이다.
천운 스님 약력 1947년 월정사에서 지암 스님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58년 선운사에서 지암 스님 계사로 구족계 수지. 1960년 선운사 도솔암에서 대교과 수료. 그 후 송광사, 용암사, 도갑사 등에서 수선안거. 조계종 포교원 포교대상 수상. 교정대상 자비상 수상. 지금은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원장이며, 대흥사 조실이다. 광주 향림사에 주석. 저서로는 <금강반야바라밀경> <지혜와 큰 사랑을 그대에게> <쉼없는 보살행>등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