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 스님은 “벼는 6개월 만에 결실을 맺는데 인간은 60년을 살아도 싹틀 꿈조차 꾸지 못한다”고 일갈했다.
“기지도 못하면서 날려고만 하지 말고 물어 봐!”
중생-부처 둘 아닌 하나지만 차제법은 분명히 서 있어 ‘성불’욕심 전 부처님 수행과정-펼친 뜻부터 헤아려야 남 걱정 말고 하루에도 수십 번 죽는 자신부터 살펴라
불살생(不殺生)! ‘함부로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이지 말라’는 이 계는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5계 중 하나다. 그런데 이 ‘불살생’을 ‘죽지 말라’는 말로 재해석하며 법을 펴는 선사 한 분이 있다. 바로, 황대선원에서 눈 푸른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는 성수 스님이다.
함양 황대마을로 들어서자 아직 추수 안 된 벼가 바람에 흔들리며 황금물결을 자아냈다. 빨갛게 물든 단풍과 어우러지니 벼와 나무가 ‘결실’을 화두로 선문답이라도 나누는 듯하다. 성수 스님은 효봉, 구산, 인곡, 청담, 성철 스님과도 촌철살인의 거량을 나눌 만큼 법거량에 정평이 나 있는 선사다. 단순한 선문답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둘 중 하나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만큼의 긴장감 넘치는 거량이다.
성수 스님의 일언 즉 오도송으로 알려진 한마디는 ‘우주 만물 선 아닌 게 없고, 세상의 모든 일 도 아닌 게 없다’는 ‘우주만물 무비선 세상만사 무비도(宇宙萬物 無非禪 世上萬事 無非道)’다. 외람되지만, 이 일언이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상세히 알고 싶었다. 한 선사의 오도과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성수 스님은 10대 후반에 ‘원효대사’같은 도인 한 번 만나 보겠다며 운수행각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 날 범어사를 찾아 ‘큰 중 나오라’소리쳤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다. 스님도 아닌 초라한 차림의 거사가 이렇듯 당돌하게 소리치니 범어사 대중이 그를 그냥 둘리 없었다. 일주문 밖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큰 중 나오라!”는 그의 고함만 높아질 뿐이었다. 한 스님이 나오자 대중이 일제히 엎드렸다. 한 눈에 보아도 이 절 ‘큰 스님’인걸 알 수 있었다. 그가 한마디 했다.
“도인 만나려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도인은 커녕 큰 중 한 명 없더라. 산 좋고 물 좋은데 고대광실 같은 집(절) 짓고 그냥 놀고먹으며 사는 게 스님이란 말인가! 전 국민이 스님 본받아 출가해 다 놀고먹으면 시주는 누가 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 절을 불사를 것이다!”
뼈 있는 일갈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말에 ‘큰 스님’도 일정부분 동감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는 사실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큰 스님’은 ‘동산 스님’이었다. 한 거사의 일침도 놓치지 않는 동산 스님의 법도 놀랄만하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상세하게 묻자 스님은 범어사 시절을 다시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동산 스님께 한마디 하고는 내 그랬지. ‘호랑이 이기는 게 소라 하는데 난 풀이나 먹으러 산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리곤 물었어. 제일 높은 산이 어디 있냐고. 엎드려 있던 대중 한 명이 ‘천성산’이라 그래. ‘천성산에서 제일 높은 암자는 어디오?’ 그랬더니 ‘조계암’이라 해. 그래 그 길로 곧장 천성산 조계암으로 갔어.”
호랑이 이기는 동물이 소라는 말은 옛 어르신들이 아이들에게 일러 주었던 말이다. 소가 호랑이를 이길 수 있겠는가! 아마도, 매사 일을 소처럼 우직하게 하다보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조계암에 도착하자 한 스님이 ‘왜 왔느냐?’ 물었다. ‘영웅이 되려 왔다’ 답하자 그 스님은 거사가 머무를 방 하나를 내어 주었다. 어느 날 그 스님이 다시 물어 왔다
“왜 왔는가!” “영웅이 되려 왔습니다.” “영웅치고 글 모르는 사람 없다. 내 일러줄 터이니 공부해라.” “수행하는데 글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굳이 배워야 한다면 딱 세 글자만 배우겠습니다.” “난 세속에서 글은 안 배웠어. 아예 관심이 없었거든. 그래 맨날 나무나 하며 살았지. 그런데 글께나 한다는 어른들로부터 원효 스님에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 나도 그런 도인 한 번 만나보겠다고 길을 나섰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불연이 있었나 봐. 스님이 한 글자 써주며 읽어보라는 데 내 아나. 두 번째 글 써 보이며 또 일러보라는데 알 리 없지. 세 글자 알고 나면 또 한자 써 보이며 읽어 보라는 거야. 그렇게 한 자 한 자 공부를 해 갔어.”
그 스님은 후에 성수 스님의 은사가 되어 준 성암 스님이었다. 성암 스님이 글을 가르쳐 준다며 내보인 내용은 ‘초심’이었다. ‘초심’을 떼고 나니 ‘발심’과 ‘자경문’이 그 뒤를 이었다. 성암 스님은 지금까지 배운 초심과 발심, 자경문을 49일동안 10만독을 하라 명했다. “한 달 만에 완독했지. 그러자 이번에는 스님이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는 거야. 한 달 동안 걸어 당도한 곳이 정암사였어. 적멸보궁에서 10만배를 하자고 해. 그래 성암 스님과 함께 10만 배를 올렸지.”
10만 배를 마치고 조계암으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동해 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 중턱의 토굴에 이르자 성암 스님은 “여기서 정진하라”일렀다. 원효 스님 수행처라는 것이다. ‘원효’라는 말 한마디에 군소리 없이 틀어 앉아 초근목피로 목숨만 유지하며 정진해 갔다. 3년쯤 흘렀을 때 산에서 약초 캐는 사람들이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성수 스님도 은사를 뵙고 싶은 마음에 토굴을 나섰다.
당시 은사 성암 스님은 내원사 주지를 맡고 있었다. 은사와의 만남에서 성수 스님이 한마디 했다. “스님, 골치 아픈 절 주지 그만 두고 ‘스님 주지’나 하세요.” 절만 보살필 게 아니라 자신을 살펴보라는 말일 것이다. 제자의 당돌한 말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제자를 아끼는 은사의 마음은 지대했다. 성암 스님은 효봉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해인사로 가 공부하라 일렀다. 성수 스님은 해인사로 발길을 돌렸다.
해인사 일주문 들어서면서부터 ‘사단’이 났다. ‘효봉 스님 만나러 왔다’하니 대중들이 ‘아직 큰스님 만날 그릇이 안 된다’며 막아 선 것이다. 이에 주눅 들 ‘성수’가 아니었다. 당시 해인사 방장은 효봉 스님었으며 부조실은 인곡, 도감은 구산, 입승은 서옹 스님이었다. 경내가 어수선 하자 구산 스님이 나섰다. 해인사 온 연유를 들은 구산 스님은 성수 스님에게 ‘공양주’를 맡으라 했다. 그냥 어른이 하라면 하면 될 것을 이마저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내가 도 닦으려 출가했지 대중 먹여 살리려 출가했는 줄 아시느냐고 쏘아붙였지. 그랬더니 구산 스님이 나를 청담 스님에게 넘겼는데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니 결국 효봉 스님에게 불려갔어. 효봉 스님은 ‘네 이놈! 하심해라!’ 해. 그래 한 마디 했지. ‘상심도 모르는데 하심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치기어린 말이지만 말장난 만은 아니다. 도를 배우겠다는 원력과 선지가 배어 있는 한마디다. 효봉 스님은 말을 닫은 채 삼일 동안 두문불출 했다. 해인사 대중들은 ‘버릇없는 성수’를 끌어내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효봉 스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만류하고는 다시 성수 스님을 불렀다.
“왜 왔느냐?” “도를 배우러 왔습니다.” “도는 집에 있는데 왜 왔는가?” “집에 없으니 왔고, 있다 해도 모르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무(無)자가 곧 도이니 7일 이내 해결하라. 그렇지 못하면 맞아 죽을 것이다.” 성수 스님은 14일의 기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14일 이전에 해결하지 못하면 조실 주장자로 맞아 죽어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각서에 지장을 찍었다. 촌음이 아까웠다. 좌복 위에서도 ‘도야 빨리 나와라 나와. 그렇지 않으면 난 죽는다. 부처님 빨리 알려 주세요’했단다. 14일 생명 선고를 받은 환자와 다름없었으니 수행 며칠만에 상기병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래도 엿새 날이 되니 몸은 회복됐다. 정진 후 기일이 다 돼 효봉 스님 앞으로 갔다.
“도 가져왔습니다.” “그건 아니다.” “성수 내 것은 도 아니니, 효봉 조실 스님의 도나 내어 보이십시오.” “그러면 못 쓴다.” “쓰고 못 쓰고 할 게 어디 있습니까?” “이 놈!” 이 한 찰나에 일언이 튕겨져 나왔다. “쓰고 못 쓰고 할 게 어디 있냐고 반문 하는 순간 터져버린 거지. 우주만물 무비선이요 세상만사 무비도라!”
어느 날 효봉 스님이 상단법문에서 일렀다. “문수야, 부처를 잡아다가 대중공양 올려라. 대중들이여 말해보라, 맛이 어떠한가? 시주 밥 한 달 먹고도 대답 못한다면 당장 가야산 문 밖으로 나가라!” 대중이 침묵한 가운데 성수 스님이 또 한마디 했다. “대중은 모르니 물어 본 효봉 스님이 답해 보시오!” 그러자 효봉 스님은 “조용히 가라!”하고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성수 스님은 그 뒤를 쫓아 가 문지방을 중심으로 한 발은 방장실로 한 발은 밖으로 내어 보였다. 청담 스님과도 일전이 있었다. 청담 스님이 말했다. “닦아라!” “무엇을 닦으란 말입니까?” “일념으로 해라.” “생각이 뭔 줄 알아야 하지요.” 2일간의 언쟁 속에 성수 스님은 3일째 청담 스님에게 멱살까지 잡혀야 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지. 시건방진 것도 잠재워야 하고, 치기도 가라 앉혀야 하고, 선지식 편에선 얼마나 골치 아팠겠어. 그래도 끝까지 내치지 않고 가르친 거지.” 성수 스님은 그래도 효봉 스님이 제일 고맙다고 한다. 효봉 스님이야 말로 ‘하심’이 뭔지, 그 하심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바로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 두어번 뵙지 못했지만 효봉 스님 재일만큼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 갔다고 한다.
법거량의 단면이기는 하지만 거량의 진면목을 만끽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절집에는 ‘사자 새끼가 넘쳐 나야 한다’고 자주 말한 성수 스님의 뜻이 헤아려진다. 선법은 모르면 물어야 한다. 묻고 답하는 중에 하나씩 깨어져 갈 수도 있고, 큰 의문 하나도 단번에 풀릴 수 있다. 그러려면 용심을 내야 한다. 큰 절 주지나, 선원장, 방장 앞이라 해서 주눅 들 필요가 없다. 자신이 가진 살림살이 솔직하게 내 놓고, 그에 따른 상대방의 경책을 거름삼아 마음 밭을 갈면 되는 것이다.
“기백 넘치는 운수납자 보기 어려워. 언제든지 저 방문 고리 열어젖히고 들어와 한 소식 나눠 보자 하면 덩실덩실 춤을 출 텐데 말이야. 선가도 그렇지만 거사들도 사자 새끼가 되어야 해.” 성수 스님은 부처님의 수행과정이 무엇인지, 성불 후 중생에게 일러 준 방편의 권도가 어떤 뜻인지도 모르며 ‘마음이 부처’라는 말에만 천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 한마디 듣고 엎드려 길 줄도 모르면서 날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하지만 차제법이 있는 만큼 무턱대고 ‘성불’하겠다고 철없이 덤벼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일례로, 부처님 말씀 한 마디도 새겨들을 줄 알고, 모르면 물으라는 것이다.
“불살생 의미도 돌이켜 보아야지. 미물도 귀한 생명이니 함부로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었다 살았다 하는 자신은 왜 못 보는가. 내가 살아야 뭇 생명도 살아 있는 거야. 정신 차리고 자신을 똑바로 보아야 살고 있는 게지, 희미하게 보고있으면 산 송장이지 뭐. 법당에 가서도 부처님께 여주어 봐! 죽지 않고, 안 늙고, 안 아픈 방도가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 간절하게 물으면 답이 나오게 되어 있어. 부처님이 상주설법하고 있는데 제자들 물음은 뒤로 하고 공양만 축내시고 계시겠어?
묻지도 않고, 답도 못 얻으면서 무작정 절만 하고 나오는 사람 보면 참 장관이야. 선지식에게도 가서 여쭤 봐. 상대방 도 내놓으라 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것부터 ‘턱’내어놓고 여쭤 보란 말이야. 그 분들이 당신 절만 받고 절 값 안 할까봐? 무엇 하나라도 내어주지 그냥은 안 보내! 자기 집에서 기르던 소나 개가 없어지면 당장이라도 찾으려 하면서도 주인인 자기는 잃은 지가 오래 되어도 찾을 마음은 고사하고 잃었는지조차도 몰라. 언제 철들거야!”
황대선원을 나서자 황금물결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성수 스님의 일성이 다시 들린다. “벼는 인연토를 만난지 육개월 만에 결실을 맺는데,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우리 인간은 육십년을 살아도 싹틀 꿈도 꾸지 못 해.” 그리고 또 한마디가 들려온다.
“해인사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도 다 해인(海印)이야!” 황대선원에 서 있는 감나무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성수 스님 은
1923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나 44년 양산 내원사에서 성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 48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조계사, 범어사, 해인사, 고운사 주지를 맡으며 대작불사도 일으켰다. 1981년 조계종 총무원장, 1994년 조계종 전계대화상 등을 역임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이며, 경남 함양 황대선원, 산청 해동선원, 서울 법수선원의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문촬요』,『불문보감』,『열반제』,『선행문』등이 있다.
<출처 : 법보신문 11월 02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