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안에 위치한 보물 제235호 ‘장의사지(莊義寺址) 당간지주’ 안내판이 최근 새로운 디자인으로 교체됐지만 정작 핵심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한 ‘엉터리 안내판’이란 비난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3월부터 국가지정 문화재 100개와 시지정 문화재 176개 등 총 276개를 대상으로 기존 안내판을 기와진회색 유리로 제작된 안내판으로 바꾸는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안내문안도 우리말과 영어로 표기됐던 이전의 형태에서 벗어나 중국어와 일본어도 함께 쓰고 있으며, 장황한 설명 대신 꼭 필요한 정보만 골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안내문안도 대폭 바꾸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문화재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부실 안내판들도 속속 지적되고 있다. 장의사지 당간지주 안내판도 그 중 대표적인 부실 사례로 꼽히고 있다.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논산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운 사찰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기록돼 있는 이 절은 삼국통일과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충신을 기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정착되면서 고려는 물론 조선의 임금들까지 직접 다녀가기도 했다.
특히 조선 태조비인 신의왕후의 기신제가 이곳에서 봉행된 이후 왕실의 각별한 관심 속에 성종 때까지도 ‘법석(法席)’이 끊이질 않았던 유서 깊은 도량이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5) 돌연 “장의사를 없애고 그곳에 별궁을 짓고 화단을 쌓으라”는 명에 따라 하루아침에 폐사된 조선불교의 슬픈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절터다. 그리고 이곳 당간지주는 1000년 장의사의 영욕을 보여주는 유일한 문화재다.
이런 까닭에 장의사지 당간지주를 설명하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도 간략하게나마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에 세웠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장의사지 당간지주 이해를 위해선 역사적인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가 교체한 안내판에는 이런 부분이 쏙 빠져있으며, 장의사가 어떤 사찰인지에 대해선 단 한 줄도 언급돼 있지 않다. 다만 당간지주가 무엇인지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문화국 문화재과 담당자는 “안내문 작성은 문화재 전문위원들 담당으로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진행됐다”며 “안내문을 소책자처럼 구구절절 쓸 수 없고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 (안내문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것 아니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같은 서울시 행정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높다. 최근 장의사지를 답사한 최병헌 서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문화재가 소중한 것은 그 안에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라며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무성의하기 그지없는 탁상행정의 전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정범(서울 옥천암 주지) 스님도 “이곳 바뀐 안내판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며 “안내문의 길고 짧음을 떠나 보물로까지 지정된 문화재를 이렇게밖에 소개할 수 없는 행정당국의 안목이 한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장의사지 당간지주 안내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불교계가 자체적으로 불교문화재 안내문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를 실시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조계종총무원 문화부 이분희 행정관은 “지난 3월 서울시가 불교문화재 명칭을 바꾸면서 불교계에 협조를 요청해왔던 것처럼 불교문화재 관련 안내문 작성에 있어서도 서로 협력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장의사지 당간지주 안내문을 비롯해 불교문화재에 대한 소개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정식으로 요청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번에 바뀐 서울지역 문화재 안내문의 변경 내용에 대해선 전혀 보고받지 못했다”며 “장의사지 당간지주 안내문 내용을 파악해 문제가 있다면 시정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