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전등사 회주 보광스님은 속가 외할아버지인 고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40여 년을 사찰 한 곳에 머물며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다. 종정을 역임한 고암스님은 보광스님에게 “시비에 얽매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사진=김형주 기자
“현세에서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가장 중요”
과거에 행복했으면 지금 행복할 것이며 지금 행복하면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부산 구덕운동장 근처 현대식으로 된 지상 4층 규모의 큰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일주문에 해당하는 대문 지붕만 기와를 얹고 나머지는 모두 현대식이다. 전등사(傳燈寺)다. 종정을 역임한 자비보살로 불리던 윤고암스님의 병원 진료를 위해 지은 사찰이다. 고암스님은 이곳에서 신도들에게 법문을 하며 법을 폈다. 큰 스님이 가시고 그 상좌가 40여년 간 한결같이 지키고 있다.
지난 11일 부산에는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항구 도시 부산은 바람이 많고 거세다.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1972년부터 줄곧 전등사를 지켜온 스님은 “이렇게 크고 유명한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겠다며 찾아오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절 이름은 고암스님이 지었다. 관세음보살이 주석한다는 보타낙가산에서 따 ‘보타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이 이름을 어려워했다. 그 상좌가 부처님 법을 전한다는 뜻으로 전등사(傳燈寺)라고 했다. 은사스님이 지어준 보타원도 담아서 ‘전등사 보타선원’이라고 했다. 그러다 최근 전등사로 확정했다. 주지는 고암스님의 증손자가 맡고 있다. 상좌는 이제 은사 스님이 입적할 무렵 나이와 비슷한 일흔을 앞두고 있다. 한보광스님이다.
이력이라고 내세울 특별한 소임을 산 적이 없다. 은사스님을 모시고 해인사를 떠나온 후 40여년 가까이 한 곳에 머물며 은사스님이 그랬듯 신도들을 만나 부처님 말씀을 하고 기도하며 당신 수행을 한다.
스님은 어릴 적 군수나 경찰서장이 되고 싶었다. 아이가 만날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이 군수와 서장이었다. 6.25가 막 끝나고 어수선하던 1950년대 중학생이던 소년은 겨울 방학 때 작은 외삼촌이 피난 와서 정착해 살던 남쪽 땅 마산에 들렀다. 외삼촌은 한 번도 들어본적이 없던 작은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 분은 스님이라고 했다. 소년은 절에서 온 사진 한 장을 보았다. 한국전에 참전한 태국 군인이 가져온 잡지에는 태국 국왕이 스님에게 합장하는 사진이 실렸다. 스님이 위에 서고 왕이 밑에 있었다. 소년은 충격을 받았다. 소년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스님이 국왕보다 더 높습니까.” 할아버지가 껄껄 소리내며 웃었다. “아 그럼 높다 마다.” 소년은 탁발승이 오면 뒤따라 다니며 놀리곤 했는데 스님이 왕보다 높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물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까.” 스님은 “그럼 그럼”하고 또 웃었다. 방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년은 보름 만에 다시 내려왔다. 이번에는 스님이 되기 위해서.
속가의 외할아버지를 은사로 출가했다. 바로 윤고암스님이다. 처음에 범어사로 갔다. 1년 머무르며 경을 배웠다. 경전 뿐만 아니라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한다는 가르침도 배웠다. 해인사 강원에 입방했다. 쟁쟁한 강사들이 많았다. 강고봉스님, 운허스님 등 당대 강백에서부터 젊은 강사 지관스님도 있었다. 열심히 배웠다. 그렇게 해서 졸업도 하기 전에 중강에 임명돼 학인을 가르쳤다. 중강을 하면서 큰 방 부전 소임도 부여 받았다. 웬만한 신임이 없으면 맡지 못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중요한 소임을 한 꺼번에 둘이나 맡은 것이다. 하지만 출가한지 아직 10년도 안된 ‘생짜’인데다 세납도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큰 절 소임을 둘이나 맡았으니 그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보광스님의 회고다. “속가 부모님이 모두 책임감이 강한데다 뒷받침을 잘하는 분들이었다. 어느 해 집안 잔치를 하는데 모두들 먹고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두 분은 물을 길어 나르고 계셨다. 어머니께서 보다 못해 남들처럼 음식도 드시면서 편히 계시지 고생을 하느냐고 힐난하니 부친께서 ‘먹는 사람 있으면 나르는 사람도 있어야지’하시는 것을 몰래 들은 적이 있다. 그 정신이 나도 모르게 머리에 박혀 출가해서도 늘 궂은 일을 앞서하고 남들보다 더 일을 했던 것 같다. 대중들이 큰 방을 청소하면 가운데는 한 번만 밀어도 되지만 끝 자리는 두 번을 밀어야하는데 나는 늘 가장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나는 무심코 했는데 어른스님 선배스님들이 눈여겨 보셨던 것 같다. 그래서 출가한지 얼마 안되는 어린 나에게 중요 소임을 맡긴 것 같다.”
스님은 부담이 컸다. 그 중에서도 새벽 세시 예불이 가장 부담이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하도 신경을 쓰다 보니 밤 11시를 새벽으로 잘못 알고 도량석을 도는 바람에 선원 강원 스님들이 모두 뛰쳐 나온 적도 있었다. 혹시 물을 먹으면 새벽에 소변을 보기 위해 일어날까 일부러 자기 전에 물을 잔뜩 들이킨 적도 있다. 스님은 “이왕이면 한 두시 쯤 깨면 좋겠는데 꼭 어중간한 시간인 1시에 깨, 잘 수도 그렇다고 깨어있을 수도 없는 낭패를 자주 겪었다”며 웃었다. 소임을 4년간 아무 탈 없이 잘 마쳤다. 그런 가운데 은사스님의 뜻을 따라 선원에서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아 전법게도 받았다. 스님은 “고암스님으로부터 선(禪)을 잇고 지관스님으로부터 강(講)을 전수 받았으니 허투루 산 셈은 아니”라고 말했다.
전등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신 뒤 지금껏 빠트리지 않는 불사가 있다. 신도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들려주는 일이다. 고암스님이 생전에 50회를 했다. 지금까지 451회를 이어가고 있다. 스님은 하지만 부처님 말씀이라며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은 경전에 가장 잘 나와 있다. 내가 함부로 해석하고 조립해서 할 성질이 아니다. 은사스님께서도 그 때문에 부처님 말씀 배우려면 경전을 보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스님이 신도들에게 들려줄 법문을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다. 스님이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은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마음’이다. 다음은 스님이 들려준 법문 요지다.
“지금이 문제다.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지나간 불행 행복은 소용이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다. 과거에 행복했으면 지금 행복할 것이며 지금 행복하면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현세에서 부처님 처럼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지금 현재 이 순간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을 잘 써야한다. 이 마음을 쓰는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안심(安心)이다. 마음이 평안해야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 절에서 채공이 무를 써는데 마음이 조급하면 절대 제대로 못썬다. 안심이 안된 상태에서는 농사를 짓든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절대로 제대로 안된다. 안심은 마음가짐이다. 그 다음이 조심(操心)이다. 평생 어른들이 아이보고 조심하라고 일르는데 조심은 안심한 마음을 행위로 옮기는 의미다. 무를 썰 때 조심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벤다. 한석봉 어머니가 따로 없다. 조심조심 일하면 농사를 짓든 자기를 만들든 모두 한석봉 어머니처럼 된다. 그렇게 조심해서 하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되고 남들이 보기에 흡족할 것이다.
그런데 남이 인정을 해주어도 자신이 인정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일류 장인이 그런 부류다. 자기가 진정 조심해서 하는지를 스스로 돌아봐야한다. 그것이 바로 관심(關心)이다. 내가 중노릇 잘하는가, 남 지탄받을 일은 하지 않나 하며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이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처럼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마음을 제대로 쓰는 것을 용심(用心)이라고 한다. 우리가 참선을 하고 염불하며 수행을 하는 것은 모두 용심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 즉 마음을 제대로 쓰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염불하고 참선 잘하면 지혜가 증득된다. 많이 알아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사량지(思量智)에 불과하다. 그것은 막힘이 많다. 박사학위를 딴 아들은 사량지는 있지만 자신이 아는 범위 내의 지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배우지는 못했지만 염불 참선을 많이 한 부모는 불계지(不計智)를 발휘한다. 그것은 막힘이 없다. 계산하지 않는 지혜를 갖기 때문이다. 이 불계지가 생기면 안심 조심 관심 용심을 가장 바람직하게 쓸 수 있게 된다.”
스님은 “따지고 보면 출세했다는 은행장 재벌 고위관료가 한 순간 무너지는 것도 모두 조심하지 않고 관심을 덜 기울여서”라며 “마음을 잘 써 잘사는 것이 부처님의 한결같은 가르침임을 명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보광스님은…
194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15세에 고암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 강원 졸업, 대교과 때 중강 소임, 제방 선원에서 선 수행. 1972년부터 부산 전등사에 주석. 부산시공무원 불자회 법사 경승 등을 하며 포교. 해인강원 총동문회 회장 역임.
<출처 : 불교신문 11월 14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