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백양사 야단법석' 나흘째, 향봉 스님은 '조사어록을 통한 깨달음의 길-임제록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법문했다. 향봉 스님은 좌선지상주의의 간화선 수행풍토는 문제가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향봉 스님은 "임제 스님은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凝心入定)면 이러한 무리들은 조작심의 수행자일 뿐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선지식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배불리 먹고 좌복에 앉아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모아 관법(觀法)한다고 하는데 이 또한 외도무리라고 임제 스님은 질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향봉 스님은 "요즘 선방에서 법거량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너 나 없이 법거량의 선문답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선 수행자는 많으나 열린 선지식은 쉽게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고 진단했다. 스님은 "조사어록을 뚫는 지혜의 안목은 간절심으로 시작해 간절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며 "오로지 간절심 하나로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어(語) 묵 동(動) 정(靜)이 통일된다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선지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다음은 향봉 스님의 법문 요지.
<상응부경전>과 <잡아함경>에 있는 말씀을 옮겨 놓는다. “이 법(法)은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거르지 않고 과보(課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며 지혜 있는 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비구들이여, 전도(傳道)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논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가르쳐라. 또한 원만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지만 법을 듣지 못한다면 더욱 악(惡)에 떨어지고 말리라. 그들이 법의 드러난 진리를 들으면 깨달음에 이를게 아니겠는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장군촌으로 가겠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논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를 펴라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불교의 경전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와서 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만을, 논리와 표현을 갖춘 법만을 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선어록(禪語錄)은 어떠한가? 논리와 분석을 배격한다. 처음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다. 이원론을 버리면서도 일원론에 머물지 않는다. 연기(緣起)의 법칙인 존재론적 상의성과 연관성마저 훌훌 벗어버린다. 선어록에 있어 사고(思考)나 설명은 죽은 송장에다 채찍질을 하는 경우처럼 의미를 잃고 만다. 어떤 학자는 조사어록을 설명할 때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라 표현했지만 어록에 담긴 정신은 형이상학 쪽 보다는 형이하학 쪽에서 오히려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어록에는 두변이 없다.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아닌 것이다. <법화경>의 한 구절처럼 일체만물이 본래 고요하고 텅 비어 있는 것으로 관조하되 텅 빈 것에 머물지도 않는다. 텅 빈 가운데 충만이 있고 충만 가운데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중국 선불교(禪佛敎)의 거목인 임제스님의 목소리를 <임제록>에서 옮겨 보겠다. “수행자들은 명심하라. 도(道)에 이르는 길은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앉아있는 등의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상시의 일상생활, 이를테면 옷 입고 밥 먹고 똥오줌 누는, 하여 목마르면 물마시고 졸리우면 잠을 자는 하루의 일과 속에 도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말을 듣고 웃겠지만 마음이 열린 지혜로운 자는 이 뜻을 알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시원한 일화 하나 소개 한 뒤 임제스님의 말씀으로 이어가겠다. 처휘진적스님이 깨달음을 이루어 첫 설법을 하기 위해 법상에 앉아 있을 때다. 많이 모여 있는 대중들 사이에서 한 동자승이 일어나 당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제가 듣기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첫 설법을 하셨을 때는 황금빛 연꽃이 땅에서 솟아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스님의 첫 설법에는 무슨 상서로운 조짐이라도 있었는지요?” 그러자 스님은 법상 위에서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방금 문 밖의 눈을 쓸었네.”
다시 임제스님의 말씀을 이어가겠다. 임제스님은 수행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해 참사람에 이르는, 깨달음의 길을 일러주고 있다. 첫째는 주체를 버리고 객체를 남겨 두는 경우, 둘째는 객체를 버리고 주체를 남겨두는 경우, 셋째는 주체와 객체를 다 버리는 경우, 넷째는 주체와 객체를 다 남겨두는 경우. 첫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아집과 편견에 의해 나(我)라고 하는 주관적 생각들이 걷혀야만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지만 보이는 대상에 따라 마음의 작용이 쉬임이 없으나 존재론적인 근원의 움직임을 깨달아 산을 보아도 산일 수만은 없고 물을 보아도 물일 수 만은 없는 것을 말함이다. 셋째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닌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에 대한 조화를 이루는 눈을 뜨게 되지만 상대성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보는 나와 보이는 사물이 참나(眞我)를 이루어 걸림과 막힘이 없는 대자유의 참사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산은 산인 그대로, 물은 물인 그대로 차별이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의 열린 지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져죽지 않는 진리와의 한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물론, 타지않고 죽지않는 것은 육체가 아닌 차별이 없는 참사람의 대자유를 누리는 정신 세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마음을 바로보아 부처를 이루는 선(禪)의 생명이자 어록의 특징인 것이다.
임제스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선사들은 깨달음을 성취한 뒤 떠난 자리를 뒤돌아 오는 것이다. 주체를 버리고 객체를 남겨두는 경우의 1단계 이전에 이미 넷째단계인 객체와 주체를 남겨두는 경우가 우리네 일상생활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단계에 이어 객체를 버리고 주체를 남겨두는 경우와 주체와 객체를 다 버리는 단계를 뛰어넘어 주체와 객체를 그대로 두는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일상생활 그대로가 선지식의 삶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바퀴를 돌아 나오는 치열한 구도자의 뼈아픈 체험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객체에 끌려다니고 주체에 얽매여 생사(生死)의 윤회를 거듭하는, 범부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의 가르침처럼 한 바퀴를 치열한 정신력의 간절심으로 돌아나와 버릴 객체도 머물 주체도 없는, 상대가 적멸한 절대의 무념처(無念處)에 이르게 되면 객체는 객체 그대로 주체는 주체 그대로 평상심이 도(道)가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진리 아님이 없으며 옷 입고 밥 먹으며 졸리 울 때 자고 목마를 때 물을 먹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는 것이다. 사바예토가 당생극락(當生極樂)이 되는 것이다. 임제스님이 즐겨 쓰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참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불교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을 이룬 대자유인의 열린 세계에 있다. 임제스님 또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우리가 출가한 것은 진리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이 산승(山僧)의 경우를 들어보라. 처음에 나는 계율을 지키기에 전념하였고 또한 부처님의 경전과 그에 따른 주석서를 열심히 뒤적이면서 그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써왔다. 그러다가 나는 늦게야 철이 들게 된다. 모든 계율이나 경전 등에는 환자의 치료를 위한 약방문과 중생들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기 위한 로정기의 방편설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방편문과 약방문의 처방들을 던져 버리고 직접 진리와 맞부딪쳤다. 다행히 나는 훌륭한 선지식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하여, 나는 마음이 열렸고 앞선 스승들이 깨달은 바를 이해하여 쉽게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는 것이다. 열린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집착과 분별심에서 벗어나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에 힘써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간절심으로 정진하되 주체와 객체의 두변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가해야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든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 곳에서 떠나가야 한다. 아니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이면 부모를 죽이고 그가 친척이면 친척마저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최상의 해탈인 대자유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막힘과 걸림이 없는, 차별이 없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 멀리하고 또한 죽이라는 것이다. 그가 설령 부처일지라도 조사일지라도 또는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일지라도…. 이것이 간절심으로 이어지는 선(禪)의 특징이자 어록의 생명력인 것이다. 부처와 조사만을 죽이면 안 된다. 나 까지도 내 몸뚱이마저도, 차별심과 집착심마저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 던져 송두리째 태울 수 있는 그런 간절심이 무위진인에 이르는,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름길과 열쇠마저도 버려야 만이 진정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한국불교계의 선방의 정진풍속도를 살펴보면 간절심 보다는 타성에 젖은 습관적 정진형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짜여진 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에 길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거연륜이 관록이 되어 선방소임의 자리가 높아가고 선지식이 없는 선방에서 습관적 타성에 젖어 정진의 실타래를 풀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두(話頭)는 의심덩어리인데 일률적인 틀 속에서 천년이 지난, 의심이 안 되는 화두를 의심하고 있으니 간절심이 모아질 리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구참과 신참납자가 한 방에서 짜여진 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에 맞춰 앉고 서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머물러 고요함을 보고(住心看靜)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擧心外照)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攝心內燈)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凝心入定) 면 이러한 무리들은 조작심의 수행자일 뿐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선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배불리 먹고 좌복에 앉아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모아 관법(觀法)한다고 하는데 이 또한 외도(外道)무리라고 임제스님은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선방에서 법거량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너 나 없이 법거량의 선문답(禪問答)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선 수행자는 많으나 열린 선지식은 쉽게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의 사람 가려내는 모습을 옮겨 보겠다. "제방의 학인들이 찾아오면 나는 세 가지 근기로 끊는다. 중하근기가 오면 경계만 빼앗고 그 법은 없애지 않으며 중상근기가 오면 경계와 법을 함께 빼앗으며 맨 으뜸근기가 오면 경계와 법과 사람을 다 빼앗지 않는다. 만약 격(格)을 벗어난 경계를 가진 사람이 오면 나는 전체로 작용하여 근기를 따지지 않는다. 대덕들이여. 이 정도가 되면 공부하는 이의 경계는 바람 통할 곳도 없어서 전광석화라도 벌써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눈동자를 두리번거렸다하면 이미 빗나가고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면 이미 틀린 것이며 생각을 움직였다하면 이미 어긋나니 아는 이라면 눈앞을 여의지 않는다.
임제스님은 부처를 구하고 도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에게 날카롭게 지적한다. 참부처는 형상이 없고(眞佛無形) 참도는 바탕이 없으며(眞道無 ) 참법은 모양이 없다 (眞法無相) 이어서 다시 임제스님은 말하고 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佛者心淸淨) 법이란 마음이 맑은 것이며(法者心光明) 도라는 것은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깨끗한 빛(道者 處處無 淨光)이다. 그러나 이 셋은 결국 하나로서 모두가 빈이름일 뿐 사실은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부처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를 잃고 도를 구한다면 도를 잃으며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기 때문이다.
조사어록에는 언하(言下)에 대오(大梧) 하는 아름다운 법연(法緣)들이 많이 모여 있다. 조사어록에는 출가 수행자가 아닌 재가자들의 법거량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곳곳에 담겨있다. 우선 황벽스님이 제자인 임제스님을 대우선사에게 보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법연부터 소개해 보겠다.
임제스님이 황벽선사를 모시고 정진하는 처소에 목주스님이 함께 있었다. 목주스님은 후배인 임제의 법기(法器)를 알아차리고 조실인 황벽선사의 방에 들어가 무엇이 불법(佛法)의 정확한 뜻이냐고 물으라 한다. 목주스님이 시키는 대로 임제스님이 황벽선사를 찾아가 무엇이 불법의 정확한 뜻이냐고 묻자마자 황벽선사는 임제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주스님의 권유로 세 차례나 묻고 세 차례나 스승에게서 제자는 얻어맞게 된다. 임제스님은 선배인 목주스님에게 하소연하듯 작별인사를 고하게 된다. ‘스님의 자비로 큰스님께 세 번가서 물었으나 세 번을 다 얻어맞았습니다. 저는 업장이 두터워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함을 스스로 한탄하고 이제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목주스님이 임제스님의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스승 황벽선사께 하직인사나 드리고 떠나라고 이른 뒤 임제보다 먼저 황벽선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차례 스님께 법을 묻던 후배가 법기(法器)를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와서 하직인사를 드리거든 방편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정진해서 뒷날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하직인사를 황벽선사에게 드리자 스승이 말하였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고안 여울가의 대우스님을 찾아뵙도록 하라. 너에게 반드시 무어라고 말해줄 것이다.’ 하여, 임제스님이 대우선사를 찾아뵙자 대우스님이 대뜸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황벽스님의 휘하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제가 세 번 불법의 긴요한 뜻을 묻다가 세 번이나 얻어맞았는데 저에게 허물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벽스님이 그토록 간절한 노파심으로 너 때문에 수고하셨는데, 다시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고 없고를 묻는 거냐?’ 대우선사의 이 말을 듣고 임제스님은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를 이룬 뒤 말하였다. ‘황벽스님의 불법이 원래 별 것 아니군요.’ 대우선사는 임제의 멱살을 움켜쥐고 말하였다. ‘이 오줌싸개야? 아까는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이제 와서는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데 너는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말해보라. 빨리 말해!’ 임제스님은 대우선사의 옆구리를 세 번 주먹으로 쥐어박자 대우선사는 임제를 밀어 젖히면서 말하였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
인용문이 길어졌으나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깃들어져 있어 원문내용 그대로를 옮긴 것이다. 후배의 법기(法器)를 알아차린 선배의 안목과 배려, 제자를 다른 스승에게 보내는 열려있는 지혜, 깨달은 제자를 본래의 스승에게로 돌려보내는 아름다움. 한국불교계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일화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임제스님의 말씀으로 옮겨가겠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눈앞에 작용하는 이놈이 바로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는데 그대들은 믿지 않고 밖에서 찾는다. 착각하지 말라. 밖에도 법은 없으며 안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대들은 내 말을 듣느니 아무 일 없이 쉬는 편이 낫다. 이미 일어난 것은 계속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면 그것이 십년 수행해 온 것보다 나은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많은 일들은 없는 것이며 다만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뿐이다. 제방에서 온 그대들은 모두가 마음이 있어서 부처가 되려하고 법을 깨닫고저 하며 해탈하여 삼계(三界)를 벗어나고자 한다. 어리석은 이여, 삼계를 벗어나 어디로 가려하느냐? 부처와 조사란 그들을 존경하여 붙인 이름일 뿐이다. 삼계를 알고자 하느냐?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들 마음자리를 떠나 있지 않음이니 그대들의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이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이며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로서 그대들 몸과 마음을 떠나 따로 없는 것이다.”
하여, 임제스님은 부처와 조사도 이름 붙여 부처와 조사이듯이 동, 서, 남, 북이 본래 없는 것이며 이름하여 동, 서, 남, 북이라 칭할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사방(四方)의 중앙인 세상의 중심이며 어느 곳에 머물더라도 세상의 주인공(隨處作主)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개하고픈 인용문은 <육조단경>에서 만난 구절이다. 극락세계를 눈앞에서 보여 주겠다며 혜능선사가 대중들에게 들려준 법어내용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서방극락세계는 십만 팔천국토를 지나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밖으로 구하지 말고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서 비롯되는 십악(十惡)을 제거하고 팔사(八邪)를 멀리하면 앉은 자리,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서방의 극락세계인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십악을 제거하면 앉은 자리에서 10만국토를 가는 것이요 팔사(八邪)를 멀리하면 서 있는 자리에서 8천국토를 지나가는 것이니 오늘의 이 자리가 곧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이 있는 정토임을 잊지 말라. 어디에 머물던 집착심이 없이 마음이 평화로우면 그 곳이 곧 극락세계요 자신이 곧 아미타불임을 알아야 한다.
참고로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옮겨 놓는다. 십악은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陰) 기어(綺語)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貪) 진(嗔) 치(癡)이다. 팔사(八邪)는 팔정도(八正道)에 반대되는 것을 말함이다. 「유마경」제자품에 팔사(八邪)와 팔해탈(八解脫)이 등장함을 볼 수 있다. 사견(邪見) 사사(邪思) 사어(邪語) 사업(邪業) 사명(邪命) 사방편(邪方便) 사념(邪念) 사정(邪定)이다.
조사어록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간절심에 대한 일화가 많이 실려있다. <전등록>에서 3가지만 옮겨보겠다.
약산스님과 운암스님이 함께 산을 오르내리다가 허리에 찬 장도에서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나자 운암이 물었다. ‘어떤 물건이 소리를 내지?’ 그러자 약산은 빠르게 칼을 뽑아 입을 찍는 시늉을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동산선사는 ‘살펴보라, 몸을 던져 이 일을 위했던 일을. 참선하는 수행자로서 향상(向上)의 일을 밝히고 싶다면 이 뜻을 반드시 체득해야만하리라. 하였다.
위산선사가 그의 제자인 앙산스님과 함께 차밭에서 차잎을 따고 있을 때 스승이 제자에게 말하였다. ‘종일토록 차밭에서 그대의 목소리만 들릴 뿐 그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그러자 앙산스님이 차나무가지를 흔들자 위산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작용만을 얻었을 뿐 본체는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스승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위산선사가 잠자코 침묵으로 대하자 제자인 앙산이 말하였다. ‘스승께서는 본체만을 얻었을 뿐, 작용은 얻지 못하였군요.’ 그러자 스승이 제자에게 ‘그대에게 몽둥이 30대를 때려야겠구나.’하였다.
마조선사가 그의 제자인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을 때 인기척에 놀란 들오리떼가 날아오르자 백장스님이 들오리떼를 보고 있었다. 이 때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인가?’ ‘들오리떼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이미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스승인 마조선사는 제자인 백장스님의 코를 움켜쥐고 비틀어버리며 ‘이래도 날아갔다고 하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참선 수행자는 첫째도 간절심, 둘째도 간절심, 셋째도 간절심으로 일관되게 정진해야 된다. 쨍그랑하는 장도소리에 정신이 옮겨있거나 차잎을 따는 작업 중에도 오로지 간절심일 뿐 목소리가 떠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길을 걸을 때에도 들오리떼에 간절심이 흩어져 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참선수행자는 아닐 터이다. 스승이 차가지를 흔드는 제자에게 침묵으로 꾸짖는 모습에서, 제자의 코까지 비틀어가며 간절심으로 되돌리려는 스승의 노파심이 돋보이는 일화였다.
<전등록>이나 <선문염송> 그리고 <조당집>이나 <벽암록>등의 조사어록에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 널려있다. 깨달음의 문을 여는 수수천개의 열쇠가 박혀있다. 다만 우리가 지름길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열쇠의 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습관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착의 병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어록은 대개가 민중들의 언어인 속어(俗語)로 짜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역사, 문화, 풍습, 야사(野史)와 전설까지 등장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역사의 흐름처럼 문자의 기록도 해석도 달라질 수 있을 터이다. 언어와 문자는 의사전달과 소통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글과 말의 표현의 한계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조사어록에는 말과 글의 한계를 벗어던진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격외도리로 춤추고 있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기둥이 되어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어록에 널려있는 지혜의 말씀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비수가 되고 화살이 되어 환한 빛줄기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조사어록의 바다에서 생선 한 마리 건지지 못하는 것은 닫혀있는 마음 탓도 있겠지만 속어(俗語)와 고어(古語)에 대한 무지(無知)도 채찍을 맞아야 할 허물임을 밝혀 둔다. 조사어록을 뚫는 지혜의 안목은 간절심으로 시작해 간절심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오로지 간절심 하나로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어(語) 묵 동(動) 정(靜)이 통일된다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선지식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진리는 드러나 있다. 문은 활짝 열려있다. 개문즉 투장안(開門卽透長安)이 아니라 개문즉장안(開門卽長安)인 것이다. 일통(一通)은 일체통(一切通)이다.
<출처 : 붓다뉴스 11월 25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