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11월 24일 강사 :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 장소 : 광주동구 KT문화센터 주제 : 여래의 사자(使者)를 만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을 통해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이런 주제입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위 가족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세 가지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면 부모와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부모님으로 인해서고, 또 내가 죽지 않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의 공덕입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이 성장해서 결혼하면 아내와 남편이란 부부관계가 형성됩니다. 이 부부관계는 내가 선택한 거예요. 부모가 강권을 했던, 어떻게 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가 선택한 인연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그 다음에 조금 시간이 흐르면, 자식을 낳게 되어 자식과의 관계들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 자식에 대한 선택, 이건 부부처럼 선택에 속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습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책임은 부부에 대한 책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평생 맺어가는 인간관계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보면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니까 고마운 분이고, 은혜를 입었기에 감사해야 하는 관게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자식은 부모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나를 더 교육을 잘 안 시켜줬다, 어릴 때 야단을 쳤다, 재산을 더 많이 안 물려줬다.’ 그러니까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고마워하고 은혜를 갚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아직도 바라고,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을 갔고 있습니다. 부모와 갈등이 있다는 것은 내가 부모에 대해서 고마워 할 줄 모르고, 은혜 갚을 줄 모르고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라는 관계는 내가 선택한 것이고, 세상에서 말하듯이 사랑으로 맺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부관계가 대부분 원만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이 어느 정도냐? 원수를 보듯 합니다. 그러니까 “야! 이, 왠수야!” 라고 할 때. 원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남편밖에 없어요. 얼마나 괴로우면 원수라고 그러겠어요.
왜 이렇게 부부관계가 고통이 될까? 그 이유는 우리가 맺고 있는 부부관계가 굉장한 이기심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는 그 사람 키가 얼마나 크냐?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 집안이 얼마나 좋냐? 공부를 잘 하냐? 이런 거 잘 안 따집니다. 애가 되먹었냐! 이것만 따집니다. 즉, 의리가 있냐! 이것만 따지면 돼요. 사업을 할 때, 동업을 할 때, 거래를 할 때도 딱 한 가지만 봅니다. 신용이 있느냐!
그런데 결혼을 하려고 선을 볼 때는 어떻게 봅니까? 열 가지, 스무 가지를 봅니다. 키도 조금 커야 하고, 얼굴도 예뻐야 하고, 신체도 건강해야 하고, 학벌도 좋아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직업도 좋아야 하고, 거기다가 성격도 좋아야 하고, 나만 사랑해야 하고….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친구를 사귀다가 의리가 없으면 친구 관계를 그만두잖아요. 사업을 같이 하다가 신용이 없으면 그만 둡니다. 그런데 부부가 살면서 종합적으로 굉장한 의심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좀 살아보면서 뭔가 내가 손해가 아닌가? 즉, 덕 볼라고 결혼을 했는데 살아보니까 별로 덕이 없어. 그러면 “에이, 혼자 사느게 더 낳을 걸.” 조금 더 지나면 덕 보기는 커녕 손해를 봐. 그러니까 “같이 살 필요가 없겠다. 혼자 사는게 낳겠다.” 이렇게 해서 헤어질 생각을 해요. 이렇게 우리가 갈등하는 것은 출발할 때 관점이 벌써 잘못됐다 이겁니다.
부부관계가 안 좋으니까, 왜 안 좋냐? “내가 속았다. 돈 있는 줄 알고 결혼했더니 돈이 없더라. 성격이 좋은 줄 알았더니 성격이 나쁘더라. 속았다.” 그 말은 상대가 나쁘다 이겁니다. 그래서 갈등의 원인은 다 상대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에게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왜 저런 여자, 저런 남자를 만났느냐? 이것에 대한 이유,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까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나온 말이 뭐에요? “궁합이 안 맞다. 전생에 우리는 원수였나봐. 전생의 원수가 이생에 부부가 된다.” 이런 말을 하잖습니까. 부부가 그만큼 갈등이 심하기에 이런 속설이 생겨난 겁니다. 부부관계가 나쁜 것은 궁합 문제도 아니고, 사주팔자 문제도 아니고, 전생의 원수도 아니고 바로 덕 볼려고 하는 이기심으로 만났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 이겁니다.
이제 자식의 문제예요. 자기가 낳아서 자기가 키웠으니까 닮아도 누굴 닮겠어요? 자기 닮겠죠. 그러니까 자기가 낳아서 자기가 키웠으니까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하는데 자식들 자기 뜻대로 안 되잖아요. 이 자식을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는 그게 문제예요. 이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입고 커도 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 보다는 간섭하는 사람, 속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간섭을 안 받으려고 집 나가잖아요. 부모가 자식이라고 맘대로 하려고 한다는 거죠. 그래서 부모와 자식 관계가 나빠집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온갖 것을 해줬는데 자식이 고마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원망하니까 부모로서는 원수를 하나 키운 것 같죠. 그래서 또 하는 이야기가 “야! 이 원수야!” 할 때, 남편 다음에 두 번째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자식 이예요. 그래서 또 속설이 생기는 거예요. 전생의 원수가 이생의 부모 자식이 된다. 이런 속설들이 왜 생기느냐? 현재의 부부나 부모와 자식 관계가 그 만큼 나쁘다. 이런 이야기예요. 즉, 인생의 절반 이상이 결국은 부모님이나 아내, 남편, 자식 때문에 이게 인생의 고민의 90%를 차지합니다. 그러면 왜 가족 관계를 맺고 사느냐? 행복하려고.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기 위해서 가족관계를 맺는데, 이 가족관계가 행복은 커녕 도리어 불행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은 원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즉, 인간관계를 잘못 맺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잘못 맺고 있느냐? 바로 인간관계의 올바른 원리, 법칙, 이치 이걸 모르고 소위 무지하게 무지해서 관계를 잘못 맺고 있다 이겁니다.
물질에는 물질의 성질이 있어요. 우리가 물질의 성질을 모를 때는 이용하는데 굉장한 불편을 겪습니다. 지금은 그런 물질의 법칙을 이용해서 우리가 물질을 내 필요에 맞게 이용합니다. 그것처럼 사람에 마음에도 작용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원리를 모르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전생의 죄도 아니고, 사주팔자도 아니고, 하느님의 벌도 아니고 무지, 무명(無明), 이것이 모든 고(苦)의 근원이 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는 거기에 법칙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알게 되면 내가 원하는 데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그 원리를 모르면 어떠냐? 좋게 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나빠지니까 억울하죠. 그래서 하늘을 원망하고, 전생을 탓하고, 팔자타령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은 있는 그대로의 법칙, 자연에는 자연의 성질, 생명에는 생명의 원리, 마음 작용의 원리,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라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봉사가 눈을 감고 세상이 어둡다고 불 켜라고 아무리 고함을 쳐도, 아무리 불을 켜도 더 이상 밝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눈을 떠라”하셨어요. 그게 깨달음이라는 거죠. “무지를 깨우쳐라.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이 본래 밝아 있다. 악몽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계속 괴로워한다 해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하지만 해결 할 수 없다. 다만 잠에서 깨면, 눈을 뜨면 그 모든 괴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런 무지 속에 있기 때문에 인생사가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며, 그 무지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것은 뭐냐?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무지와 무명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하신 말씀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부모님 때문에 괴롭다던지, 어떤 아내나 남편으로 인해서 인생살이가 괴롭다던지, 어떤 자식 때문에 괴롭던지 할 때 ‘이 인간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 하는 원리와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 두 가지만 알면 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 처럼 까르마(Karma) 즉, 업식(業識)을 완전히 벗어나 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노인은 노인의 어떤 성질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 부모님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몸뚱이도 굳어서 유연하게 휘어지지 않듯이 이 생각도 바뀌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어르신들의 성질 이예요. 이미 습관화 된 것들은 고쳐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르신이나 부모님을 자꾸 내 생각으로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이렇게 하면 좋습니다, 저렇게 하면 좋습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부모님과 자꾸 갈등이 생겨요. 그러면 어르신과 관계를 맺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맞춰 주는 것이 좋다. 언제나 부모님이 뭐라고 그러시면 “네~ 알겠습니다.” 이런 게 제일 좋습니다. 그러면 누가 좋다? 부모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좋습니다.
그러니까 어르신 뜻대로 할 수 있으면 “네, 알겠습니다”하고, 못 하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돼요. 이게 인간관계를 맺는 지혜입니다. 부모님이 말하거나 어르신이 말할 때 그것을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따지면 안된다는 거예요.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된다 이겁니다. 안되는 것을 자꾸 고치려고 하면 내가 화가 나고, 지치게 되고, 관계가 나빠집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것을 “어리석다” 그러고, 이런 이치를 아는 것을 “지혜롭다” 그래요. 어리석으면 원수를 만들고, 지혜로우면 원수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부부지간에는 자라온 환경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말을 해도 그 말이 들리는 방식이 서로 다르게 들립니다. 자기가 듣기 좋은 소리만 들리고, 싫은 소리,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소리는 안 들려요. 이걸 첫째 인정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르다는 걸 생각 안하고, 부부니까 항상 생각이 똑같은 줄 알아요. 이게 착각이라는 거죠. 남이면 오히려 확실히 약속을 잡는데, 부부는 이걸 분명하게 잘 안 해요. 대충해 놓고 자기 생각대로 남편이 다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늘 뜻이 안 맞는 거예요. 근데 이게 말이 안 통하는 게 아니예요. 착각 때문에 오는 현상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아내들이 남편에게 자기 할 말을 다 못해요. 그래서 늘 속이 꽁해 있어요. 참다가 참다가 말을 하니까 말을 할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내가 세 번 생각하면 세 번 남편이 거절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남편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계속 혼자서 생각을 하며 나쁜 사람으로 자꾸 만드는 거예요.
이유가 어디 있느냐? 남편을 내 맘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내가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자유이듯이 남편도 자기 생각 표현하는 것을 자유라고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대화를 할 때 망설일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그냥 가볍게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내가 원하는 답을 상대에게 정해놓고 요구하지 말라. 그에게 언론의 자유를 줘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줘라.’ 이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말에 너무 집착해요. 그래서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란 말도 신의를 지킨다는 측면에서는 좋지만, 이것이 일상생활 속에서 가볍게 살지 못하게 해요. 항상 마음이 무거워요. 무거우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견해를 고집하는 것. 즉, 사명감이라는 것이 견해를 고집하는 건데 견해를 고집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견해를 내려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져요.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은 마음이 가볍고, 맑고, 밝아야 하는 겁니다. 마음의 상태가 맑고, 밝고, 가벼워야 늘 잔잔한 행복이 오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늘 부딪치는 경계 속에서 자기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이 마음의 작용은 결국은 자기 까르마로부터 일어나는 거란 말이에요. 내가 분별이 일어나는 것은 객관 사실의 옳고 그른 게 아니고 내 업식에 의해서 이것이 옳게도, 그르게도 분별이 일어납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 이게 단순히 부부문제가 아니고 이게 공부고 수행이다 이거죠. 부부관계가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같았는데도 그런 이치를 깨닫는 순간, 모든 갈등이 눈 녹듯이 녹아집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바뀐 것이 아니고, 그대로 놔놓고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마음이 편해집니다. 나의 무지를 깨뜨려서 나의 편견을 벗어던져서 내가 자유로워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겁니다. 나의 무지를 딱 깨뜨리고 한 생각 돌이키면 세상 사람하고 소통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앉은 자리에서 바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바로 지금 나와 갈등이 있는, 내가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을 바로 수행의 과제로 돌려야 됩니다. 남편에게 일어나는 내 마음을, 자식에게 일어나는 내 마음을 늘 들여다보면서 내가 이런 분별심이 휩싸이는구나. 그를 보지 말고 나를 보라는 겁니다. 분별은 죽을 때까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분별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든지, 분별이 없어야 한다든지 이런 단정을 짓지는 마세요. 분별이 일어날 때 다만 분별을 일으키고 있구나, 내가 내 생각에 또 사로잡히구나, 내가 옳다고 고집하구나, 다만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이 지속 되면 탓하는 마음은 없어지고 나를 봅니다. 언제나 경계에 부딪혀서 나를 보게 되고 항상 거기에 끼어있게 되면 마침내 경계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의 원리를 보세요. 닭도 병아리를 까면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덤빕니다. 그만큼 부모는 자식을 옹호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 어떻느냐? 돌봐주는 사람은 있는데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픈 마음을 움켜지고 지켜봐야 됩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뭐든지 따라 배우다가 자기가 자기 것으로 하기 시작하는 사춘기 과정에 무조건 부모가 다 해줘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 사람은 나이가 스무 살이 넘고, 대학은 나오고, 박사는 땄는데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 자립적으로 살 아무런 능력이 안 되어 있어요. 결혼 생활도 제대로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춘기 때는 냉정하게 지켜봐주는, 그러니까 공부를 좀 못하든, 사고를 치든 그것이 다섯 가지의 계율에 어긋나지 않으면 지켜봐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으면 부모는 자식과의 일체 관계를 끊어줘야 합니다. 그럴 정도로 해야 자식이 자립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 세상을 자기가 주인이 돼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여러분들은 자녀의 길을 막아놓고, 자녀가 길이 막히니 부모 밑에 붙어서 평생을 살게 되고,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을 하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은 자식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노인은 맞춰주고, 부부관계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주고, 자식은 어릴 때는 돌보아 주고, 사춘기 때는 지켜봐 주고, 성년이 되면 정을 끊어주고. 그리고 자식에게 생기는 문제는 나의 문제임을 늘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불법에는 수행만이 있습니다. 재가든, 출가든 그 수행을 전문적으로 출가해서 하느냐, 재가에서 수행하느냐의 차이 밖에 없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스님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마음을 늘 세상 속에서 보림을 하듯이 여러분들도 불법을 만나서 견도(見道) 법의 이치를 먼저 깨닫고, 그 다음에는 그 삶 속에서 보림 하듯이 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을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거울로 생각해서 늘 그런 공부를 놓치지 않고 해나가면 오히려 스님들보다 더 빨리 해탈할 수가 있습니다. 이유는? 연습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삶 속에서 늘 인간관계를 공부거리로 삼아버리면 훨씬 더 빨리 해탈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상대를 변화시켜서 내가 거기 안주하려고 그러느냐? 덕 볼려 하느냐? 아니면 내가 깨쳐서 상대에게 혜택을 주는 쪽으로 이해가 되려 하지 않고 이해하는 쪽으로, 사랑 받으려 하지 않고 사랑 하는 쪽으로, 도움 받으려 않고 도움 주는 쪽으로 내 삶을 보디사트바(Bodhisattva, 보살)로 전환 할 것이냐. 이 기준만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다시 법에 돌아가고, 생활 속에서 정진을 해 나가신다면 행복은 추상적으로 볼 필요가 없어요. 일상 속에서 자기 마음이 가볍고, 밝고, 맑아야 그것이 행복이지, 일상을 떠나서 행복인 건 아니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서 힘듦은 있지만 괴로워서는 안 돼요. 괴롭다는 것은 자기가 뭔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일상사 속에서 정진을 하면 일상적으로 늘 찰나 찰나, 매일 매일 정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정진하게 된다면 어떤 돈으로, 지위로 살 수 없는 그런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서 여러분이 조금 더 부처님 법에 집중하고 귀의하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