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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수행 정진은 열반 이르는 방편”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노동의 가치, 불교에 묻다] 호진스님, ‘초기경전의 노동’ 법문

안성 도피안사(주지 송암스님)가 마련한 특별법회 ‘노동의 가치, 불교에 묻는다’가 지난 21일 도피안사 대웅전에서 열렸다. 전 동국대 교수 호진스님이 초기경전에 나온 ‘불교의 노동문제’를 주제로 이날 법문했다.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노동은 행위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행위’ 대신 ‘업’(業, karma)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업은 반드시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현재 생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고, 현재 짓는 업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인간이 짓는 행위를 업(業)이라고 하지만, 모두 업은 아니다. 업다운 업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결과인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행위는 업이 아니다.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윤리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행위이어야 한다. 업은 성질에 따라 선업과 악업으로 나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은 행위는 무기업(無記業, 중성적인 업)으로 무정란과 같이 결과를 낼 수 없다.

요약하면 불교에 있어서의 행위, 즉 업은 단순한 행위만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때문에 불교의 노동은 출가와 재가의 노동으로 구분해 논의돼야 한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생활양식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재가자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지만, 출가자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소유를 생활신조로 삼는 출가자에게 허락된 것은 세벌의 옷과 발우가 전부였다. 그 이상의 물질은 탐욕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수행에 방해만 될 뿐이다.

반대로 정신적인 노동은 장려됐다. 출가자의 수행 목적은 물질적인 안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의 추구에 있다. 물질적인 것은 열반을 얻는 수단일 뿐이다. 부처님은 출가자의 수행을 재가자의 육체노동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경전(耕田)이라는 경에서는 부처님은 자신을 농부로 자처하기 까지 하고 있다. 농부는 농부지만 ‘마음밭(心田)’을 가꾸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불교에서 물질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에 드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열반은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궁극의 목표다. 출ㆍ재가자의 모든 행위와 노력은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출가 수행자가 될 수는 없다. 출가수행자가 되어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차선(次善)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목표는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거나, 아니면 복덕을 구족한 사람으로 태어나 근기(根機. 교법을 닦아 깨닫는 능력)를 쌓아 다음 기회에 열반을 기약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재가자는 물질적인 생산을 해서 출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고, 출가자에게 그들의 정신적 노동의 결과를 나누어 받아야 한다. 즉 정신적인 노동자인 출가수행자와 육체적인 노동자인 재가자는 상호 보완하면서 공동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여시어경(如是語經)에는 “비구들이여, 재가자들은 여러분에게 의복, 음식, 침대, 약 등을 공양해 도움을 준다. 여러분도 그들에게 선법(善法)과 범행(梵行. 청정한 생활)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은 서로 도우면서 종교 생활을 행할 수 있고 윤회의 강을 건너 고(苦)를 끝낸다. 재가자와 출가자는 서로 의지하면서 선법을 번창하게 한다. 출가자들은 의복 등을 (재가자로부터) 받음으로서 궁핍을 모르고 살 수 있고, 재가자들은 (출가자로부터) 좋은 ‘세계(善途)’로 가는 길을 배우고 닦아서 다음 생에 천상에 태어나 많은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이처럼 출가자와 재가자는 전념하는 분야가 다르지만,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상호 보완적인 작용을 한다. 이외에도 출가자는 재가자가 복을 지을 수 있는 복전이 되어 줌으로써 재가자의 이익에 기여한다.

재가자에게는 노동이 장려된다. 가정을 거느리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재가자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제4권에는 “선남자가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혹은 임금(王)을 섬기고, 혹은 글씨, 글, 셈, 그림으로써 이것저것 직업에 꾸준히 힘쓰는 것도 수행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현재에 편안한 생활조건을 만드는 것인 동시에, 후생에도 편안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궁극 목표인 열반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되기도 한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불교의 궁극 목표는 열반의 성취이지만 재가자는 여건과 능력에 있어 단번에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밟을 수 없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노동에서 얻은 결과를 다른 사람, 특히 출가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증일아함경〉에서 “그는 재물을 얻으면 중생들에게 보시한다. 즉 부모, 처자, 종들을 돌보고 나아가서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보시해 많은 공덕을 지어 천상에 나게 될 복을 심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재가자들에게 육체적 노동이 장려된다고 해서 아무 노동이나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즉 업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생에 연결되고 다음 생을 결정짓는 기본 요소이다. 노동도 일종의 행위이므로 노동 행위는 이생에서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 생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그래서 ‘해서 좋을 노동’이 있는가 하면, ‘해서는 안 될 노동’이 있다. 해도 좋은 노동이란 이번 생에서도 좋고, 다음 생에서도 좋은 노동이고, 해서는 안 될 노동이란 설사 이번 생에서는 괜찮더라도 다음 생에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재가자들에게 권장하는 노동은 농업, 상업, 목축, 건축업, 관리, 무술 등이다.

이와 반대로, 해서는 안 될 노동도 있다. 세속 법으로는 합법적인 것이라 해도 남에게 해가 되는 것이면 해서는 안 된다. 남이란 다른 동물까지도 포함한다. 해서는 안 될 노동들을 구체적으로 들어보면 고기잡이, 사냥, 도살업, 무기매매, 술장사, 독약매매 등과 같은 것들이다.

노동과 사회 계급 문제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독특하다. 부처님이 살았던 당시의 인도와는 다르다. 전통적인 인도사회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4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계급마다 하는 일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선천적인 계급과 그 계급에 따라 정해지는 노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출신 성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어나서 각자가 하는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아무리 가문이 좋다 해도 본인의 행위가 좋지 않으면 그는 천한 사람이다. 또 아무리 천한 가문에 태어났다 해도 그 자신의 행위가 고상하면 그는 바라문이다. 〈잡아함경 제4권〉에서 부처님은 “태어난 종성으로 영군특(領群特, Vasalaka)이 아니요, 태어난 종성으로 바라문이 아니다. 그 행위 때문에 영군특이 되며 그 행위 때문에 바라문이 된다”고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처해있는 계급이 천하고 종사하는 직업이 나쁜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행했던 전생의 행위나 직업에 의한 결과 때문이지, 단지 조상의 신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역시 현재의 신분이나 직업이 나쁜 것이라 해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다음 생에 다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노동은 일종의 행위로, 업의 일종이다. 따라서 노동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며, 개인과 사회의 운명을 만다는 핵심요소다. 노동에 의해 우리들 존재의 과거가 형성됐고,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불교에서는 물질적인 행복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는다. 물질은 해탈하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열반의 성취는 출ㆍ재가 모두의 궁극적인 과제로, 노동이라 불리는 모든 행위와 노력은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정리 =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 이 기사는 '불교신문'에서 가져왔습니다. [원문 보기]
2009-12-04 / 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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