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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불성’ 알아차리고 실천해야 불제자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지상법문-헝가리 원광사 주지 청안 스님

서귀포시 대포동 약천사(주지 성원 스님)와 (사)붇다클럽 천지회(회장 김영식)는 지난 6일 헝가리 원광사 주지 청안 스님을 초청, 대적광전에서 대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청안 스님은 법문을 통해 “고통과 깨달음을 넘어선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자 이미 존재하는 지혜의 힘인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우라”고 강조했다. 이날 법문을 요약 정리했다.

사찰에 가면 용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용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고, 여의주는 무슨 의미일까요? 여의주는 우리의 정수, 수행의 결실을 말합니다. 용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수행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당에 있는 여의주는 우리 인생에 많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의 은사이신 숭산 스님은 항상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엇을 얻겠습니까. 인간들은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데 이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정도(正道)에 들어섰다면 모든 것이 무상하고 주변 환경에 따라 지배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깨달음을 얻어 대자대비의 마음을 얻는 것이 큰 덕목입니다. 인생의 진실을 봄으로써 망상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욕망이나 소유욕을 일으키는 그 마음을 대자대비로 변환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정도(正道)라는 것은 곧장 나아가는 것이지 순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허공과 거울과 같은 청정한 마음이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체를 봤을 때 이 마음을 얻게 되는데 이 마음으로 돌아가야 진정한 여의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본성’이며, 생과 사를 넘는 실체입니다. 우리의 실체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거울을 제대로 사용하면 잘 보고, 듣고 냄새도 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거울을 제대로 닦지 않으면 무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은 이것을 사성제(四聖諦)로 나눴습니다. 사성제 가운데 두 번째의 집성제(集聖諦)를 살펴보면 고통의 원인을 12연기로 설명했습니다. 12가지 연기 가운데 무지(無知)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무지라 부르는 것은 ‘지식의 바보’입니다. 이것도 무지의 한 종류이지만 무지 그 자체는 아닙니다. 무지라는 것은 우리 생각이 집착으로 가득 차 있고, 이것이 무명(無明)이 되는 것입니다. 이분법적 사고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고통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을 통해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무명을 벗어나 깨달음 얻는 것이 허공과 거울과 같다면 생과 사를 초월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그 실체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모든 만물이 참 불성을 갖고 있어 그것을 일깨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밖의 실체를 찾으려 하지 말고 우리 안에 있는 참 불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얻느냐, 얼마만큼 이해하느냐, 우리가 업에 집착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가 그 업을 없앤다면 확철대오(確撤大悟) 할 것입니다. 작은 업을 없애면 작은 업이 없어지고, 큰 업을 없애면 큰 업이 소멸됩니다.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울과 같은 청정한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거울이 청정해 보이면 다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어떤 고통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관계를 통해 바른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바르게 보고, 들은 다음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배고프면 먹고 다른 이가 배고프면 음식을 나눠주고 그 행복을 함께 나누면 되고, 어떤 사람이 슬프면 위로해 줄 수 있으면 됩니다.

이와 같이 청정한 거울과 허공과 같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반사시켜 주고 비춰주면 됩니다. 이것은 이름이 있는 것도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 생과 사를 초월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과 사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만 볼 수 있다면 자신을 청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됐다는 것은 죽었거나 자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수행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의 참선 불교는 수행할 때, 지금 이 순간을 말합니다. 바로 이 순간을 얻었다면 우리는 참 본성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제대로 한다면, 즉 마음을 이 순간에 두면 듣는 것, 보는 것이 모두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탐욕은 우리의 강적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눈을 가린 구름은 수 만 가지가 되는데 우리 마음 또한 굉장히 강해서 구름을 걷어내 진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그대로 비추고 바라보려면 조절이 필요한데 대로 비추지 못한다는 것은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은 모두 수행자입니다. 우리는 업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생각이나 말을 통해서 업을 전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부처님 법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행동, 그것이 바로 보살행입니다. 우리들은 서양에서 정도(正道)를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여줄 뿐입니다. 확실한 것은 법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정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19년 전 처음 수행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도 제게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저 스스로 확신했을 뿐입니다. 어떤 인연이 무르익었을 때의 충고만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그 자유를 존중합니다. 원광사는 매년 동?하안거를 결제하는데 자유 의지로 수행정진하게 합니다. 이 자유 의지가 우리 수행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지 않으면 그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업을 깨우쳐 부처님 법을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체, 여의주가 무엇을 뜻하는 지 생각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참 본성, 우리의 마음을 알아 모든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게 될 것입니다.


청안 스님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부모 모두가 의사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대학 졸업 후 번역 전문회사를 차려 성공했지만 삶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 때문에 방황하던 중 1991년 숭산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했고, 28살 되던 1994년 4월 출가했다. 한국에서 6년간 수행한 스님은 1999년 고향 부다페스트로 돌아간 후 선원을 운영하며 유럽 각지에서 법문과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현재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인 헝가리 원광사를 창건하고 불법 홍포에 매진하고 있다.

정리=이병철 기자


※ 이 기사는 '제주불교'에서 가져왔습니다. [원문 보기]
2009-12-10 /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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