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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아줄기세포연구는 연기론과 모순”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강신익 교수 ‘몸, 마음공부 기반 or 장애’서 주장
“몸은 단순기계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결합된 산물”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불교의 연기론과 정면으로 모순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불교계가 황 박사의 논문조작사건 이후에도 ‘줄기세포연구=보살행’이라는 지지 입장을 지속해온 것에 비추어볼 때 이 주장은 불교계 내에서 상당히 큰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12월 1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몸, 마음공부의 기반인가 장애인가’를 주제로 열린 제7회 밝은사람들 학술연찬회에서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는 “줄기세포복제와 관련하여 황우석 박사의 연구는 불교의 연기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유전자실체론을 전제로 하는 줄기세포복제와 불교의 연기론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날 토론에서 “줄기세포복제가 기계론적 입장을 전제로 한다면 연기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자, 강 교수는 “실체론과 연기론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고, 줄기세포이론은 연기론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불교도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는데 특정 유전병의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그 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 몸을 기계로 보는 시각을 묵시적으로 전제하는 것”이라며 “이는 그 조작으로 인해서 연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보지 않는 것”이라 설명했다.

강 교수는 이어 “불교계에서 황 박사의 연구를 지지하는 것의 함의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의학, 의술, 의덕-삶을 치유하는 몸과 마음의 공부’를 발표한 강신익 교수는 이날 학술연찬회에서 몸 일원론 또는 비물질적 유신론(唯身論)을 주장했다. 이는 불교의 유심론, 유식론을 염두에 둔 용어인 동시에 서양철학의 심신이원론 전통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서양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의학적 근거로 플라시보 효과와 히스테리의 예를 들고 있다. 플라시보란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환자에게 투약하지만 치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짜 약제(僞藥)를 의미한다. 플라시보 효과란 의사가 환자에게 가짜 약을 투여하면서 진짜 약이라고 하면 환자의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에 병이 낫는 현상을 말한다.

위약(僞藥)이 효과를 가지는 것은 우리의 몸이 반드시 생리적 기제에 의해서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증명으로 현대의학에서는 여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효과이다. 나아가 플라시보 효과라는 용어자체가 심신이원론적 서양의학의 오만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히스테리는 육체적인 증상은 있지만 신경학적으로는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본인은 몹시 아픈데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진단하는 경우가 있다.

강 교수는 플라시보와 히스테리에 대한 현대의학적 반성으로 대증요법이 아닌 서술적 의학(narrative medicine)의 성과와 뇌의 이야기적 측면(storytelling)에 주목했다.

이러한 근거 위에 강 교수는 몸 일원론을 주장하면서, “몸 일원론은 불교의 무아론과 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의학은 몸에 ‘대한’ 지식으로, 의덕은 몸‘의’ 규범으로, 의술은 몸을 ‘통한’ 실천으로 구분함으로써 현대의학의 범위를 확대했다.

“깨달음은 창발적 현상”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창발현상으로서 깨어있음의 몸’이란 논문을 통해 20세기 이후의 생물학의 최신성과에 기반하여 수행적 관점에서 ‘몸’이라는 주제에 접근했다. 우 교수는 1970~80년대의 분자생물학의 출현에 근거에 기반한 유전자실체론을 비판하면서 2000년 이후의 후성학(epigenetics)과 복잡계과학(science of complexity)의 연구성과에 근거해서 ‘나’를 개체고유성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화생물학의 대표주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에 의해서 소개된 진화생물학은 하나의 시각일 뿐이며, 이에 대한 굴드, 촘스키, 그랜트의 논쟁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편향된 시각을 가지게 됐다”고 비판했다.

우 교수는 진화적 관점, 면역학적 관점, 복잡계적 관점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개체고유성을 관계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수행에 의한 깨달음은 개인의 역사성과 개체고유성을 전제로 질적이면서 비가역적인 변화 즉 창발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 교수는 “우리가 ‘과학주의’를 경계해야 하듯이, 불교수행에서 ‘마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음만 다스리면 된다라는 마음주의가 아니라 몸의 중요성이 함께 인식되어야 하며, 몸과 마음은 통합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체는 정신이 체화(體化)된 몸이고, 마음은 몸이 심화(心化)된 마음”이라며 “깨달음은 무명을 떠난 질적인 창발현상인 동시에 이는 본래성의 철저한 회복”이라는 것이 우 교수가 주장하는 ‘깨달음’의 정의이다.

불교와 유교-노장의 차이 밝혀

‘수신과 양생: 몸 닦음과 마음 닦음의 조화 - 유가와 도가를 중심으로’를 발표한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는 유가와 도가, 불교에서 몸에 대한 개념상의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했다. 유가에서는 몸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마음을 ‘큰몸(大體)’으로 파악하고 있고,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라는 팔조목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 또한 수신으로서 유가에서 몸을 중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가의 본성은 도덕적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인 반면, 불교의 불성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가리킨다는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난다고 성 교수는 설명했다. 성 교수는 또한 “노장사상과 불교가 유사하지만, 유사(類似) 즉 사이비(似而非)이기 때문에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노장사상의 근원은 은자의 철학으로 자연친화적이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고, 그러므로 자연의 도리 즉 천도(天道)로 나아가야 하고, 자연의 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무위(無爲)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 교수는 “그러나 불교는 자연 또한 윤회의 세계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것 또한 초월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유교와 도교와는 다른 가치체계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식 이전의 토대로서의 몸

‘몸과 살, 그 신비하고 불투명한 토대-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니체, 메를로-퐁티’를 발표한 조광제 철학아카데미대표는 플라톤에서부터 메를로 뽕띠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 전반에 걸친 몸에 대한 견해를 일벌했다. 조광제 대표는 몸에 대한 견해를 플라톤과 창세기와 데까르트에서 보이는 심신이원론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의 예수의 성화(聖化)과정에서 보이는 심신일원론적 경향으로 대별했다.

이러한 주장은 니체에 이르러 이성중심사유의 비판과 함께 몸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고, 이를 계승한 사르트르와 메를르 뽕띠에 의해서 만개하게 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보는 내 몸과 보이는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이고, 보이지 않는 자는 볼 줄 모른다고 한다.

이는 한 찰라 이전의 인식대상과 현 찰라의 인식주체에 대한 아비다르마와 논의, 나가르주나의 ??중론??에 보이는 인식기관에 대한 고찰과 유사한 논의형식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 대표는 “사유 또는 생각에 대해서도 몸이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방해가 되는 만큼 생각을 하게 된다”며 “나아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유와 정신이 목적일 수 없고, 실체가 아니고, 본바탕은 몸이라는 것이다.

조 대표의 이러한 생각은 불교에서 분별이 가지는 부정적 역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몸 동작이 그 사람이라고 하는 주장은 ‘업은 있지만 업을 짓는 자는 없다’는 불교의 주장과 소통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세계와 몸은 작용을 주고받으면서 바뀌어 나가는 것으로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몸을 바꾸게 되고, 다시 세계를 바꾸게 되는 세계와 몸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가진다.

조광제 대표는 “몸은 객체화되고, 대상화될 수 없는 어떤 것 즉 신비하고 불투명한 토대로 남게 되고, 객체화되고 대상화된 것으로 몸을 파악하는 것”을 경고했다.

몸, 잡되 놓아야 할 것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몸, 놓아야 하는가 잡아야 하는가-빠알리 니카야의 수행관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몸에 관한 초기불교의 수행적인 관점을 초기불교의 까야(k?ya, 身)를 중심으로 발표했다. 정 교수는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몸의 구성요소와 특징에 대해서 서술한 이후 몸을 오온 각각과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또한 몸과 물질, 몸과 느낌, 몸과 마음,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몸에 대한 분류를 순서적으로 설명했다.

초기불교에서 몸은 궁극적으로 수행의 대상으로 중시된다. 수행의 대상으로서 몸은 수념처 수행 가운데 신념처로서 6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들숨과 날숨에 대한 관찰(入出息念), 걷고 서고 안고 눕기에 대한 관찰(行住坐臥),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正知), 몸의 혐오스러운 부분 관찰(厭逆作意),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四大), 시체의 더러움을 관찰(不淨觀)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처의 수행은 무상, 무아를 아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정 교수가 제기한 ‘깨달음의 상태에서의 몸’에 대한 기술과 상수멸정(想受滅定)에 관한 논의는 이날 플로어의 청중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정 교수는 “몸은 집착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결국 놓아야 할 것이지만, 그 사실을 알기까지는 관찰을 통해서 잡아야 할 대상”이며 “초기불교의 수행적 관점에서 몸은 잡되, 놓아야할 대상”이라고 결론지었다.

선에 관한 팔문팔답(八問八答)

‘선, 몸으로 하라-조사선과 간화선을 중심으로’를 발표한 변희욱 서울대 철학과 강사는 평상시 자신이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변 교수가 제기한 실존적 고민이 담겨있는 8가지 질문(八問)이지만 대답은 하나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대답을 하는 기준 또한 하나이다. 대답부터 말하자면 하나의 대답은 중도(中道)이고, 하나의 기준은 ‘깨달음이 준칙이다, 깨닫지 못하면 꽝이다’라는 이오위칙(以悟爲則)이다.

첫 번째 공덕으로 깨달을 수 있나? 대답은 공덕으로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좌선으로 깨달을 수 있나? 대답은 좌선으로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세 번째 본래면목은 청정하고 몸은 청정하지 않는가? 대답은 있다, 없다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양변이다.

네 번째 몸짓 그대로 도인가? 대답은 몸 그대로 본래 면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섯 번째 “한 물건”은 어디에 있는가? 대답은 ‘한 물건’이라는 말도 억지로 말했을 따름이다.

여섯 번째 마음이 부처인가, 몸이 부처인가? 대답은 “발밑을 보라(照顧脚下)”이다.

일곱 번째 몸의 느낌은 진짜인가? 대답은 그냥 내버려두어라이다.

여덟 번째 몸의 느낌은 가짜인가? 대답은 그냥 내버려두어라이다.

처음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형태를 띄고 있다.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면 이미 잘못에 빠지게 되고, 할과 봉만 남게 된다. 이 둘의 선택지를 넘어선 차원으로 나아갈 때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풀리게 된다. 이 차원을 넘어선 선택지를 굳이 말로 표현한 것이 ‘중도’이다. 여섯 번째 질문은 선의 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변 교수는 “중생, 부처 구분하는 것이 중생의 고질병이고, 수행해서 부처되겠다는 것이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한다. 지금 당장 발밑에서, 방석에서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보면 그뿐인 것이다. 깨달음이 “본래 면목보기, 자성보기”이라면 지금당장여기에서 보면 그뿐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덕, 좌선의 방법이 깨달음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마지막 두가지 질문은 실제 수행에서 일어나는 체험의 문제로 이러한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기준, 깨달음이 준칙이기 때문이다.

변 교수는 결론적으로 “조사의 관문을 뚫고 싶다면 몸, 마음, 중도, 화두라고 생각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고 조언했다.

탁효정 (bellaide@naver.com) 기자

※ 이 기사는 '미디어붓다'에서 가져왔습니다. [원문 보기]
2009-12-14 / 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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