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마음이 없다면 내쫓긴 대처자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15일 선학원 부설 선리연구원 월례발표회 ‘성료’
김광식 교수 ‘금오 스님의 불교정화 관련 첫 연구’ 발표
‘정화불사’의 주역인 금오 스님의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첫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12월 15일 열린 (재)선학원 부설 한국불교선리연구원(원장 법진 스님)이 12월 월례발표회에서 ‘정금오의 불교정화운동’을 주제로 금오 스님과 불교정화의 연관성을 집중 조명했다. 김 교수의 이번 논문은 금오문도회가 2008년 펴낸 《금오스님과 불교정화운동》(전2권)과 진관·각의 스님 공저 《한국불교정화운동사 연구-금오선사를 중심으로》(경서원)와 달리 금오 스님의 불교정화운동을 최초로 객관적 학술적 연구한 것이다.
김광식 교수는 먼저 이두 스님의 회고를 증거로 금오 스님이 ‘정화정신’을 체득하게 된 계기를 “1927년부터 3년여를 용성 스님을 시봉하면서 독신수행과 포교의 사명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이후 선방에서 정진하던 금오 스님이 본격 등장한 때를 “1941년 3월 4~13일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 때”로 정리했다. 특히 김 교수는 금오 스님이 선학원 유교법회에 참가한 연유를 “유교법회가 만공 스님의 적극적인 지로로 개최된 점”을 고려했다. 이는 만공 스님이 금오 스님의 건당식을 정혜사에서 치르도록 배려한 점과 연결해 유추했다. 김 교수는 또 “금오 스님이 유교법회 종료 직후 열린 선학원에서의 제2회 조선불교선종 정기 선회에서 금오 스님이 선리참구원의 이사로 선출된 점”을 지목하고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지였던 선학원과 금오 스님의 관계성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금오 스님의 불교정화에 대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김 교수는 <해동불교> 신문에 연재된 이두 스님의 회고록에서 단서를 찾았다. 1953년 대구 관음사 조실로 주석했던 금오 스님이 얼마 후 옥포 금련사라는 토굴을 만들어 생활을 하면서 수행풍토 개선, 파계 풍토, 불교 세속화의 문제 등에 고뇌했을 것으로 유추했다.
금오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에 앞장 선 것은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 유시 발표 직후 범어사 수좌 지효 스님이 수원 팔달사에 주석하던 금오 스님을 찾아와 불교정화 당위성과 추진 원칙과 방법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부터로 보았다. 금오 스님은 1954년 6월 21일 ‘불교 교단 정화 대책위원회’ 발기위원장에 추대됐다. 이때가 ‘비구승단’의 출범이었다.
김광식 교수가 주목한 점은 금오 스님이 불교정화 본격화의 최초 조직체의 책임자로 추대된 이유였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한 답을 1953년께 금오 스님이 선학원의 조실이었던 점에서 찾았다. 선학원과 상의해 불교정화운동을 본격화했고, 선학원 수좌들과 본격적인 정화 실행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1954년 8월 24~25일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 수좌대표자 회의에서 교단정화, 도제양성, 총림창설 등 결의를 통해 교단 정화의 기본방향이 수립됐다. 이 대회에서 금오 스님은 종헌 제정 위원 및 정화추진 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대회 직후 수원 팔달사로 돌아온 금오 스님은 전국비구승대회(1954년 9월 28~29)에 참석하기 위해 선학원으로 왔고, 종회의원과 아사리(감찰원장격)에 선출되면서 정화불사는 본격화됐다. 이때부터 정화불사는 운동성을 띠었다고 김교수는 보았다. 이후 금오 스님은 <서울신문>에 정화 당위성 성명서를 냈고, 1955년에는 사찰정화대책위원회에 참가했다. 불교정화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960년에는 동화사 조실로 있으면서 승려라면 제2승려대회에 마땅히 참가해야 한다면서 독려했다.
하지만 금오 스님은 1962년 4월 통합종단 출범 후 ‘재정화’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재정화는 승려의 증가문제, 승려의 자질, 사찰 점유를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다. 김광식 교수는 재정화의 바람에서 금오 스님의 재정화 의지를 1963년 9월 발족한 ‘세대불교동인회’의 고문에 선출된 사실에서 찾았다. 김 교수는 세대불교동인회가 종단 개선 관련 사항과 불교정화 계승 성격이 강했다는 점과 이 단체에 금오 스님의 상좌인 혜정 스님(총무분과장), 월탄 스님(법사분과장), 월주 스님(중앙위원)이 참여한 점도 근거로 삼았다.
김광식 교수는 특히 금오 스님의 재정화 입장을 불교신문 전신인 <대한불교> 1964년 7월 19일 자 ‘한국불교의 정안’이란 기고에서 찾았다. 이 기고에서 금오 스님은 “(중략) 이제 정화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왜냐고 묻겠는가? 삼천을 헤아리는 대처자를 내쫓은 우리가 지금 공부에 마음이 없다면 내쫓긴 그들에 비해 무엇이 더 나은 것이 있어 정화를 하겠답시고 너스레를 펼 수 있단 말인가?”라며 정화정신을 실종한 종단에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김 교수는 이 기고에서 “△정화정신 실종 개탄 △수행풍토 소실 △전국 사찰 총무원도 정화정신 상실 △선이 불교 수행의 핵심 △불교 및 승려의 본분에서 다시 시작할 것을 호소”했다는 점을 들어 금오 스님의 재정화 정신을 살폈다. 김 교수는 또 금오 스님의 재정화 의지는 결국 종정이었던 효봉 스님이 입적한 후 후임 종정 후보 물망에 올랐으나 “나는 종정 안해…나는 산에서 공부나 해야지”라며 거부한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교수는 이번 논문을 통해 △금오 스님의 행장 전반 이해 해결 △금오 스님의 수행과 선사상 △금오 스님과 정화운동을 한 고승과의 연관성 △금오 스님의 정화관 △금오 스님의 법맥, 승계, 후계 등 정리 등을 과제로 남겼다. 특히 김 교수는 금오 스님의 정화불사에 대한 일반적 관점과, 재정화 이후 관점의 변화 등 보완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더불어 김 교수는 금오 스님의 재정화 의지는 결국 불교정화운동이 1960년대에 끝나지 않고 1970년대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이날 사회를 맡은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는 “1960년대 정화는 ‘운동’이라 하기 어렵다. 흐름과 문화는 있었지만 ‘운동’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토론한 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도 “‘정금오의 불교정화운동’은 개인화된 정화운동으로 본 것인 데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유 교수는 더불어 금오 스님의 수행이력과 불교활동의 전모 등에 대한 방증의 부족, 금오 스님 관점이 불교정화운동 성격과 전개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 지에 대한 체계적 논증 보완“을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