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에 봄물이 올라 분홍빛으로 물들어도, 가을엔 홍엽(紅葉)이 화려하게 수를 놓아도, 먼 산에 얹혀지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조실부모한 어린 소년의 가슴엔 항상 쓸쓸함과 외로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이라면 일찍 출가한 형님 덕분으로 어릴 때부터 절에서 자란 것이다. 절에 또래의 친구도 없었을 뿐더러 보고 듣는 것이 예불올리고 공양올리는 것이라 혼자서 하루 종일 ‘부처놀이’를 했다. 예닐곱 살 때부터 흙으로 구멍을 파서 ‘석굴암’이라 하고, 모래를 담아 부처님 전에 공양 올렸고, 찰흙으로 부처님을 만들어 예불을 올리면서 놀았다.
열댓 살이 되자 형님은 출가를 권했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바깥세상이 궁금하여 도시로 나가서 사회생활을 했다. 성수 스님이 미타암 주지로 계셨고, 소년의 형님은 미타암에서 부전소임을 맡고 있었다. 형님은 소년에게 ‘성수 스님을 은사로 하여 출가할 것’을 권했다.
“우리가 부모복도 타고나지 못했는데, 다른 복인들 뭐 그리 있겠노. 출가하여 성수 스님처럼 도인이 되면 대통령도 안 부럽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이렇게 훌륭한 스님을 만난 것도 큰 인연이니 지금이 출가할 때인 것 같다.”
형님의 말에 소년은 출가를 결심했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평생을 기도드리면서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산성수 스님을 스승으로 불문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미타암에서 시작한 행자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또 다른 한 명의 행자와 함께 도량을 청소하고 공양을 준비하는 등 절의 온갖 허드렛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 ‘천수경’을 외우는데, 다른 행자는 하루에 한 페이지씩 외우는데 반해 소년은 두 줄 밖에 외우지 못했다. 이들을 가르치던 노스님은 소년에게 “짐승이 사람이 되어서 둔하다”는 말을 자주했고, 소년은 출가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연애편지와 사진도 태우고 돈도 다 나누어주고 마치 죽으러가는 것처럼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절에 들어왔는데, 이곳 또한 차별이 있고 경쟁이 있는 살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스님에게 나는 왜 이렇게 재주가 없느냐고 여쭈었더니 ‘전생에 지은 업이 두터워서 그렇다. 참회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일렀다.
늦게 출가한 터라 할 일도 많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삼십 리 길을 걸어 장을 봐다 나르는 등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잠을 아껴 기도를 했다. 밤 아홉시에 취침 종이 울리면 전 대중이 잠자리에 드는데, 자는 척하고 있다가 5분정도 지나면 살그머니 빠져나와 굴법당으로 향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업소멸 해달라고, 그리고 미혹에서 벗어나 혜(慧)를 달라고 기도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혜가 밝아졌음을 스스로도 느낄 정도였다. 소년은 행자생활을 마치고 범어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태응’이라는 불명을 받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태응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원각사 해동선원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 어디로 눈길을 주어도 지리산의 원융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폐교를 개조하여 만든 해동선원에 들어서면 세상을 향해 우뚝 솟은 통일대불이 먼저 반겨준다. 통일대불을 중심으로 청동미륵반가사유상과 달마상, 십일면관음보살상과 나한상 등 100여위의 석조불보살들이 봉안돼 있어 야외전시관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스님은 “한 백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석불에 이끼가 끼고 바람과 시간에 풍화되어 또 하나의 문화재가 될 것”이라 했다.
스님은 통도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몇몇 마음 맞는 도반들과 함께 강사자격증을 따서 앞으로 강사노릇을 하기로 했다. 은사 스님께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렸더니 “강원에서 일대시교를 봤으면 실천을 해야지”하고 나무랐다. “참선공부 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은사 스님의 말씀에 강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접었다. 공부를 하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은 산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오대산 상원사에 가기로 결심했다. 은사 스님은 “깊은 산에 가서 십년동안 산돼지가 되던지 뭐가 되던지 내려오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고 다짐을 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칠년간 선수행에 전념했다. 월정사 주지 희찬 스님은 태응 스님의 됨됨이를 한 눈에 알아보았기에 육이오전쟁으로 소실 된 월정사 복원불사를 위한 기도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스님은 그 중대한 임무를 맡아 적멸보궁에서 1000일 기도를 무사히 끝냈다. 스님은 “기도란 부처님과의 무언의 대화를 통해 구름을 걷어내는 작업이며, 기도를 지극정성으로 하면 그 사람의 인생 속에서 최선의 인도(引導)와 보호를 받게 된다”고 했다.
스님은 평생을 수좌로 살아왔지만 참선 수행이 제일 좋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저마다의 근기가 다르듯이 화두참선, 염불, 기도, 절수행을 비롯하여 그 사람에게 맞는 수행법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평생 어떤 화두를 참구하시는지 여쭈었다.
“강원에서 <서장>을 공부하면서 조주 ‘무(無)자’ 화두가 제일 좋다고 하기에 그것을 화두로 삼았어요. 옛날 중국에는 절에서 개를 많이 키웠는데,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지나가는 개를 가리키면서 ‘개에게도 화두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때 조주 선사가 ‘무(無)’고 했는데, 질문을 던진 그 스님은 ‘무’라는 한 마디에 깨쳐야 하는데 깨치지 못해 그것을 화두로 하여 공부한 것이지. 이렇듯 세상에 두두물물 화두 아닌 것이 없어요.”
스님은 피었다가 지는 노란 국화를 가리키면서 ‘국화는 왜 하필 따뜻한 봄날을 두고 서리오고 차가운 가을에 피는지 의심해보라’고 일렀다. 그리고 자신에게 “국화는 왜 따뜻한 봄을 두고 가을에 피는가?”하고 물어보란다.
“자신에게 물으면 참선이 되지만 국화나 꽃들에게 물으면 그것은 삿된 것이라. 자기 안에서 의심을 품고 자기 안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화두지요. 생각을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이 세상의 국토와 꽃과 중생이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고만 부자라.
화두도 방편이고 염불도 방편인데, 길은 달라도 목적은 같아요. 한 가지 방편에 집중하여 알려는 마음, 친견하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여 정진하다 보면 분심(忿心)이 일어나고 그 분심에 용맹심을 더하여 전력질주 하다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어요.”
그리고 수행정진을 할 때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순경이 있으면 반드시 역경이 있게 마련이라 했다. ‘역경을 맞이했을 때 분심이 일어나면 그것을 엔진으로 삼아 공부한다면, 그리고 삶의 교훈으로 삼는다면 대역전이 이루어져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이 한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부처 성품을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불교의 정법으로 코를 꿰어 가야 합니다. 고삐를 끌고 가는 힘이 강하지 못하면 주인 없는 소에게 끌려가는 것과 같아 곡식밭을 절단 내어버리기 십상이니 그 피해가 무한한 것이라. 화두참선이나 기도, 염불이 고삐기능을 하는데 이것으로 자신을 잘 다스린다면 자신의 목적한 바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역대조사들도 다들 그렇게 살아왔기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지극하면 이루어지듯이 ‘공부가 되나 안 되나’ 조바심내지 않고 굳게 믿고 공부하면 진척이 있단다. 스님의 이 말씀은 ‘한 생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목숨 떼어놓고 참선수행과 기도수행을 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깊은 믿음이 없고 근성이 가벼운 사람은 큰일을 해낼 수 없어요. 초발심에 보면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기 쉽고 가벼이 움직이는 짐승은 화살을 맞기 쉽다’고 했어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꾹 지키고 있으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집니다. 산의 저 늠름한 잣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비롯되었어요. 다람쥐가 입안에 잣을 잔뜩 넣고 기암절벽 위로 올라가 겨우내 먹으려고 바위 밑에 저장한 것이 저렇게 큰 나무가 되었어요.”
태응 스님은 조계사주지와 통도사주지, 불교텔레비전 초대사장, 불교방송 이사 등을 역임한 종단의 어른이시다. 수좌의 길을 가던 태응 스님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위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 이런저런 소임을 맡게 되었다. 은사 스님께서 범어사 주지를 맡게 되어 맏상좌로서 은사님을 뒷받침하기 위해 범어사 원주소임을 맡았다. 그 후에는 은사 스님께서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게 되자 태응 스님은 조계사주지를 맡아 은사 스님을 보필했다.
여러 가지 소임을 맡아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지 여쭈었다.
“통도사주지로 갔는데, 법당에 삼사백 명이 앉으니 꽉 차서 큰 설법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음 생에 부잣집에 태어나 이 불사를 이루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찌어찌하여 설법전 불사가 이루어지데요. 개원식을 하고나서 너무 좋아 혼자서 밤이 늦도록 도량을 돌았어요. 그리고 TV불교방송국을 개국하고 나서 부처님 법이 영상으로 만들어져 집집마다 들어간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스님은 십삼사 년 전, 캐나다 밴쿠버에 한국전통사찰인 ‘서광사’를 창건하여 교민사회는 물론이고 외국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숲이 우거진 6만여 평의 대지 위에 지하 100평 지상 50평의 대웅전은 미주 지역 최고의 사찰로 손꼽힌다. 스님은 ‘아직 해외포교는 걸음마 단계이며, 종단을 비롯하여 불교계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라 했다. ‘우리나라도 외국행자들을 유치해서 그들을 위한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한국불교를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다.
“서양인들도 명상이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아주 높아요. 세계의 정치인들이 부처님의 인과법을 깨닫는다면 세계평화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스님은 ‘미국이 너무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여 약소국가를 무시한 인과응보로 미국인들은 테러의 위험에 시달리고 있어 함부로 세계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서 ‘오버마를 당선시킨 미국이 대단한 국민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어떤 전쟁이 나도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안전한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9 ? 11테러로 인해 미국이 가장 불안한 나라가 되었다. “한 번 전쟁을 일으키면 비싼 이자를 붙여서 갚는 것이 인과응보인데, 그 인과는 누가 감독하지 않아도 진리가 감독하는 것”이라 했다. “부처님 당시 석가족이 몰살을 당했는데, 그것은 인과로 일어난 일이었기에 부처님께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면서 경전의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강대한 코살라국은 호시탐탐 가비라국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코살라국 군대가 가비라국을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한길 가의 고목나무 아래 앉아계셨다. 군사를 이끌고 그 앞을 지나가던 코살라의 왕 ‘비루다카’는 말에서 내려 부처님께 예를 올린 뒤 이렇게 여쭈었다.
“부처님! 잎이 우거진 나무도 많은데 왜 하필 잎 하나 달려있지 않은 나무 아래 앉아 계십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친족이 없는 것은 그늘이 없는 나무와 같은 법이오.”
비루다카왕은 부처님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군대를 돌려 코살라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비루다카왕은 또 다시 가비라국을 향해 진군해 왔고, 이번에도 부처님은 그늘이 없는 나무 아래 앉아계셨다. 부처님의 모습을 본 비루다카왕은 다시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세 번째로 비루다카왕이 진군해 왔을 때는 부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세상에 지은 인과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비루다카왕은 거침없이 가비라국을 공격했다. 살생을 금하고 있던 석가족은 이렇다 할 싸움도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몰살당하고 말았다.
“인과법이 이렇게 무서운데 욕망을 위해서 고삐 풀어진 망아지처럼 날뛰어서 되겠어요? 인과법이 바로 진리인 것이라.”
‘인과법이 진리’라는 스님의 말씀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 스님의 안온한 미소와 낮은 목소리로 자분자분 들려주시는 법문은 감로수와 같았다. 우리 중생들에게도 스님의 행복한 기운을 나누어주시기를 간청했다. 스님은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하고 웃었다.
“불교는 ‘끝없이 욕망하는 그 허덕이는 마음을 쉬어보라’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가진 대로 허덕이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더 높이 올라가려고 허덕이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 마음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고 채워진 것은 언젠가는 비워지는 것이 세상사임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또 고운 놈, 미운 놈이 다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세상인데, 이런 세상사를 두고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도 달라집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 좋게 됩니다.”
곧 세납 칠십을 맞이하게 되는데도 스님은 매일 새벽 2시 30분이면 일어나 새벽예불을 올린다. 사시예불, 저녁예불까지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공양도 대중과 같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결제기간 중에는 대중과 함께 정진한다. 24시간을 오롯이 깨어있는 수행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기에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지 여쭈었더니 “다른 소원은 없고 다음 생에도 회색 옷 입은 ‘율브리너(Yul Brynner)’가 될 계획”이라 했다. 세세생생 인욕의 회색 옷을 입고 수행자 길을 걷겠다는 스님의 원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태응 스님 약력 1956년 울산 미타암에서 성수 스님을 은사로 출가. 57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60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 통도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 강원을 마친 후 오대산 상원사에서 7년간 선수행. 조계사주지, 통도사 주지, 제11대 중앙종회의원, 불교방송 이사, 불교텔레비전 초대사장, 생명나눔실천본부 총재 역임. 캐나다 밴쿠버에 통도사 해외분원 서광사 창건. 지금은 산청 원각사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