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을 찾아서] 동국대 선학과 교수 현각 스님
……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스님은 선친에게서 “군자가 되어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君子恥一物不知)”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선친의 가르침은 소년이었던 스님의 지적 욕구를 자극했다. 소년은 무엇인가를 알려는 욕심, 지식에 대한 욕망을 키웠고, 그것은 도와 도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스님을 속리산으로 이끌었다.…… 스님은 속리산을 찾아 은사인 혜정 스님(법주사 회주)에게 출가했다. 전기불도 없던 시절이었다. 현각 스님은 법당에서 태우다 남은 초를 가져다 생장작을 태우며 부엌데기 노릇으로 출가자의 길을 시작했다.
지적욕구를 채우기 위한 출가였기에 생장작을 타면서 피어난 연기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스님은 책을 보고 싶었다. 그런 공양간 살림을 하면서 스님이 생각한 묘수는 갱두 소임을 맡는 것이었다. 갱두는 국을 끓이는 소임이다. 불을 피우고 찌개를 끓이는 동안 스님은 장작불에 책을 읽으며 지식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도가 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있다는데 그때는 몰랐습니다. 어서 공부해서 깨쳐야겠다는 욕심만 가득했지요.”
당시 은사스님은 현각 스님에게 수행ㆍ포교ㆍ역경의 3대 종단사업을 말하며 “역경도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고, 포교ㆍ수행도 ‘배워야’ 바로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공양간 생활을 마치고 스님은 강원에 들어갔다. “이제는 하고 싶은 공부를 실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강원에서 처음 배우는 <치문>부터 막혔다. 어려운 글이 너무 많아 하루 2줄 밖에 읽지 못했다.
현각 스님의 머릿속은 “이래서 어느 세월에 ‘팔만대장경’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도를 이루면 오도송(悟道頌)을 쓴다는데 이렇게 무식해서야 어찌할까?”라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래서 스님은 교학을 공부하겠다고 재발심했다. 오도송을 짓기 위한 도구를 마련하고자 시작했던 공부는 스님을 모교인 동국대에 남게 했다. 스님은 “‘업보중생’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 [전체 기사 보기]
* 이 기사는 ‘붓다뉴스’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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