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명법문] 툽텐 갸초 스님
보리도차제(菩提道次第, 람림, 깨달음에 이르는 길)는 우리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가를 단계별로 자세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무상에 대한 철저한 자각, 그리고 죽음에 얼마나 임박해 있는가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요구합니다. 이기적이고 청정하지 못한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대부분 지옥·아귀·축생과 같은 삼악도에는 태어나고 싶어 하지 않고 행복한 세상에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의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단순한 동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삼악도에 태어나는 중생의 고통을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이유는 삼악도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일으키고 그것이 싫다는 마음을 일으키라는 뜻입니다.
다음 단계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의 의미는 세상의 다른 신이나 존재에게 귀의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다른 존재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이번 생의 행복만을 추구하자는 나쁜 친구의 꼬임에 빠져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삼보에 귀의하고 다음 생에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행복한 세상에 태어나겠다는 마음을 냈다면, 열 가지 선한 행위를 잘 닦고 열 가지 선하지 않은 행위를 짓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단계의 중생을 하사도 중생이라고 표현합니다.
행복한 곳에 태어나고 싶은 마음을 내고 불법을 수행하는 것은 사실 기독교에서도 발견되는 교리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였던 적은 없지만 교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의 목적은 천국에 태어나는 것이고 지옥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실천한다면 천국에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됐든 불교도가 됐든 극락(천국)에 태어나고 지옥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궁극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령 극락에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무명(無明)이나 탐진치 삼독의 찌꺼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의 복이 다하면 다음 생에는 삼악도에 떨어질 원인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독특한 점은 열반의 증득에 있습니다. 이것은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기사 계속 보기]
* 이 기사는 ‘월간 불광’에서 가져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