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닦는 공부’
법산 스님(동국대 교수)
마음은 허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허공은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습니다. 허공은 묘한 것입니다. 온갖 색깔과 모양과 현상을 담으면서도 흔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 같으면서 그렇지 않고, 얻는 것 같으면서 얻지 못하는 묘한 실상이 다 담겨 있습니다. 마음의 뿌리를 잘 배양해서 닦으면 자연이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람들이 덕으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불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작은 생명일지라도 헤쳐서는 안 되고 파괴해서도 안 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불성이 있습니다. 무균 상태에서는 생명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충(蟲)이 있는데, 밥을 먹을 때 그 충은 우리가 먹는 음식물을 먹고 활동을 합니다. 우리 몸 전체가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모두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 귀, 코, 혀, 입 각각만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눈, 귀, 코, 혀, 입, 손, 발 모두 다 갖추고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대육신은 더불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대육신을 운전하고 다니는 주인은 맑고 신비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잘 기르면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 나쁜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보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보복을 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열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열 사람을 살린 공덕으로 한 사람을 죽인 죄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받습니다. 과보(果報)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도둑질을 한 후에 절에 가서 기도를 하면 죄가 소멸됩니까?’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참회를 합니다. 참회를 한다고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과보는 받지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그 과보가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주는 마음에서 꾸짖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분들이 밉지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참회하는 것은 다음에 받을 고통을 지금 내 스스로 마음과 몸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에게 봉사를 하는 것도 그러한 죄를 사하는 방법입니다. 무슨 대가든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또 악업(惡業)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 닦는 공부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은 이번 사건(9?11테러)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정말 억울한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가 터지자마자 바로 보복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보복은 더 큰 보복을 불러올 뿐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원한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그 원한은 끝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한이 사라지나니. 이 법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저도 싸움을 걸어오는 것을 참은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나니 참 좋습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세상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멱살 잡고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한테 미소를 지으면 그때는 진실한 미소가 나옵니다. 생각을 바꾸면 진실한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이 있는 자리에는 진실이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말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연구하라. 반야바라밀을 연구해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깨닫도록 해라. 반야(般若)라는 것은 무엇인가. 너의 본심 자성자리가 바로 반야의 자리이니라.’ 입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악에 대한 상대적인 것이어서 잘해주는 사람한테는 잘해주고 싶고 못해주는 사람한테는 못해주고 싶은 그런 차별이 생깁니다. 못해주는 사람한테 더 잘해주고 싶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인류는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모든 갈등과 시기와 질투를 끊어야만 이 세상이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난 사태는 종교적 이념의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욕심을 전부 버려야 합니다.
혼란한 상황일 때는 정신력이 중요합니다. 물려고 쫓아오는 개를 피해서 도망가면 반드시 개에게 물리게 됩니다. 개가 물려고 달려들 때 도망갈 곳이 없어야 안 물립니다. 도망갈 곳이 있으면 빠져나가려고 뒷모습을 보이다가 엉덩이를 물리게 됩니다. 뒤에 절벽을 맞닥뜨리게 될 때는 돌아서야 합니다. 절벽을 자신의 등으로 삼아서 ‘그래,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 번 해보자’하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개가 놀라서 물지 못합니다.
‘절처공생(折處共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벽같이 끊어진 막다른 자리에서 생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본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살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큰 것까지 다 잃어버립니다. 작은 것을 지키려다가 큰 것까지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만 이 세상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싱가포르에 갔을 때 대만 교민 중 한 명과 같이 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스님, 업장 소멸이 뭡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자다가 “업장 소멸, 업장 소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죄를 짓고 마음이 번거롭고 걱정이 많아서 여러 세상일이 잘 안 되는 것은 업장이 두텁기 때문이지요. 업장을 소멸해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불자도 아닌 데 합장을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신심 있는 불자가 되었습니다.
항상 생활이 고달프고 어렵더라도 마음의 뿌리를 잘 다듬고 기르기 바랍니다. 여름에 무성하던 잎이 떨어진다고 나무가 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는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 8월 24일 봉은사 일요법회 법문
* 출처 ; 만불신문 43호(2001년 10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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