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 스님(서울 대성사 조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표적인 다섯 가지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간경(看經), 불사(佛事), 주력(呪力), 염불(念佛), 참선(參禪)수행을 말합니다.
첫째로 간경(看經) 수행은 경전을 읽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과 조사의 어록을 소리 없이 눈으로 보고 읽어 나아가는 것은 좁은 의미의 간경입니다. 소리를 내어 경전과 어록을 읽는 것, 즉 독경을 하는 것이 진정한 간경이지요. 넓게는 예배 등의 행동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왜 간경 수행을 해야 할까요? 모든 법의 진리를 비춰보는 부처님 눈에 이르는 것, 그것을 성불이라고 합니다. 성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법을 분명하게 비춰봐야 합니다. 또한 일체법을 볼 수 있는 눈인 법안(法眼)을 가지기 위해서는 세상의 형상뿐 아니라 형상이 없는 것까지도 함께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 눈을 가질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간경 수행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결과 공덕으로 돌아와”
둘째로 불사 수행은 성불인연을 짓는 일이지요. 불사는 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저에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을 꼽으라면 복덕과 지혜를 꼽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탕이 되는 복전(福田)을 알아야 합니다. 밭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돋습니다. 세상도 똑같아요. 우리가 하는 행동의 결과가 공덕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복전(福田)이란 말을 사용하지요.
삼복전(三福田)은 경전(敬田)·은전(恩田)·비전(悲田)을 말합니다.
경전(敬田)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공경·공양·예배·찬탄·참회·발원하면 그것이 복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하고 음식·의복·탕약·수행기구 등을 스승과 조상님, 삼보 전에 올려야 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자식을 길러주셨습니다. 자식은 그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자식은 그 은혜를 생각하며 항상 부모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에 그 복으로 행복해 질 수 있지요. 그것이 은전(恩田)입니다.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신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힘든 사람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병들고 의탁할 곳이 없는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이 비전(悲田)입니다.
셋째는 주력(呪力) 수행을 해야 합니다. 주력 수행은 진언·다라니가 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진언은 진실한 말이라고도 합니다. 다라니는 총지, 작지, 능지, 능차 등으로 의역하기도 합니다. 총지는 선법(善法)을 모두 지녀서 흩어져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능차는 악법을 막아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다라니의 뜻이지요. 선법(善法)을 갖추어 악법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진언·다라니는 범문을 번역하지 않고 음 그대로 욉니다. 이를 외는 사람은 한없는 기억력을 얻고 모든 재액에서 벗어나는 등 많은 공덕을 얻는다고 하지요.
넷째로 염불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등 부처님을 염원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염불 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 수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지요. 네 가지 염불이 있습니다.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하는 과상염불, 부처님의 상호를 관상하는 관상염불, 자신과 일체만유의 진실한 자성인 법신을 관하는 실상염불 모두 다 중요한 염불입니다.
“마음은 마음으로 닦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참선(參禪) 수행입니다. 선(禪)은 고요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육십심’이 있습니다. 육십심을 요약하면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생각에서 우러나는 것을 육단심이라고 하고, 보고 듣고 분별하여 내는 마음을 연려심이라고 합니다. 망상을 내는 깊은 속마음을 집기심, 본성으로서 부처님의 성품과 같은 불성을 견실심이라고 합니다. 참선은 이러한 여러 마음들을 고요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법의 근본이고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 법은 이 선의 경지를 깨우쳐 주려는데 근본이 있는 것이지요.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 일어나는 곳을 깨달으면 모든 것이 고요해질 것입니다. 고요한 것이 극치에 이르면 마침내 밝아져 버립니다. 그것이 정관(靜觀)이지요. 밖의 경계를 볼 때 보고 듣는 모든 것이 허깨비와 같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환몽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환관(幻觀)입니다. 삼라만상이 환상임을 깨닫게 되면 집착을 하지 않게 되고 자성이 밝아집니다. 그래야 스스로 나쁜 행동을 그만두게 되며 선을 닦을 수 있게 됩니다. 적관(寂觀)이란 정관과 환관이 일치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안으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 없고 밖의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됨을 말하지요. 이것이 참선 수행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선은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선은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비에 관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고 없음에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은 마음을 안락한 경계에 오르게 하는 것이지요.
선(禪)은 불교에 있어서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선의 심오한 경지는 말이나 의식 작용을 통해 오를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참 지혜로서 홀연히 깨닫는 것이지요. 선 중에서 조사선(祖師禪)은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으로 깨우치는 것,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佛立文字)를 주장합니다.
선은 마음을 닦는 수심법(修心法)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으로 닦아야 할까요? 역시 마음으로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참다운 선이란 닦아야 할 마음이 없어서 닦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의 자성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수행하면 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출처 ; 만불신문 52호(2002년 3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