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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 법문] “부처님 가르침도 복력의 세계를 말씀하신 것” [법문/수행] 글자크게글자작게

 
정락 스님(전 용주사 주지)

우리는 어떤 힘에 의해 세상을 살아갑니다. 힘은 능력과 복력(福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은 체력, 재력, 지력, 사회가 제도적으로 만든 지위력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허망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산이 많다가도 망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없이 금방 무너집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자란 동네는 2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다 농사를 짓고 사는데 그중 한 분은 종이공장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종이 공장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번 돈을 가지고 논을 사기 시작하셨습니다. 1년에 몇 마지기씩 논을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거기서 나온 수확물은 가족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 여유분과 종이공장으로 번 돈으로 매년 더 많은 논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동네 청년들이 모여 계산을 했습니다. 우리 동네 전체 논이 몇 년 지나면 전부 그 분의 논이 되는지를 계산했던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계산을 하고 있길래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름철에 호박넝쿨은 하룻밤 사이에 눈에 띄게 많이 자라나요. 그런데 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리면 그 자라던 것이 딱 멈춰버리지요. 그리곤 날씨가 추워지면서 금방 없어져요. 어떤 일이든지 만약에 복이 다하면 호박 넝쿨이 뻗어가다가 멈춰 버리는 것과 같이 갑자기 망해요. 저 분도 알 수 없는 것이에요.”

그렇게 얘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만 그 분이 망했습니다. 종이공장이 잘되어서 기술도 늘었고 능력적인 면에서도 커졌는데 왜 망했을까 생각하다가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힘이 복력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위주로 삽니다. 공부하는 것,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 건강하려는 것 전부가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능력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보면서 눈에 보이는 꽃과 열매만 생각합니다. 뿌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뿌리의 세계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를 심을 때 뿌리가 뻗어갈 자리를 잡아 놓지 않으면 나무가 자라날 수 없습니다. 나무가 커질수록 그 크기에 맞추어 뿌리도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그 층수에 맞게 기초공사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2층을 지을 건물의 기초공사로 3층을 지으면 그 건물은 3층뿐만 아니라 전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이 복력의 세계입니다. 복력의 세계를 튼튼히 해놓지 않으면 능력의 세계에 상관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눈에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세계를 잘 모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복력의 세계를 얘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중생 세간은 허망한 것이 많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현실적인 욕심과 능력만 생각합니다. 복력, 나아가 도력, 수행력까지 생각한다면 삶이 달라집니다.

어려서 딱지치기랑 구슬치기를 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아이는 딱지와 구슬이 가장 많은 아이였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부자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딱지와 구슬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형이 제게 그것을 다 주었습니다. 왜 그것을 주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 형은 내일부터 초등학교를 가는데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고 ‘이것보다 더 좋은 게 뭐가 있다고 이걸 버릴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어른이 되면 이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고 안 되는 것을 다 쉬기 위해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능력과 복력은 세속적인 욕심 속에서 사는 것을 다 쉬어버리자는 것입니다.

복을 짓고 까먹으면 우리 중생의 삶도 그것에 맞추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복을 짓는 것과 받는 것은 다릅니다. 제가 청년회 회원들과 같이 다른 사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 남자회원과 다른 사찰회원들 사이에 싸움이 났습니다. 겨우 말려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등 뒤에서 여자회원들의 말이 들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몽둥이가 있다면 그 회원들을 때려 죽였음 좋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 여자회원들이 “다른 사찰회원들이 절에 와서 나쁜 마음을 반성하고 더 큰 불심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했더라면 그 회원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만약 신통력이 있다면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을 쌓는 것입니다. 나쁜 마음가짐을 가지면,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면 자기의 복을 까먹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기본적으로 비슷비슷한 욕심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쉽게 알 수 있지만 수행인의 삶은 알기 힘듭니다. 현재 그 사람을 보고 밝은 데서 왔는지 어두운 데서 왔는지는 알 수 있지만, 앞으로 밝은 데로 갈지 어두운 데로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래는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살아 왔는지와 앞으로 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씀하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요즘 우리는 능력만으로 사는 삶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을 까먹는 것입니다. 자신의 복력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편히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경지에 들어서면 그것은 완벽한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복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생에 복을 지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시대, 집안, 이런 것들이 다 자기의 전생 업보에 의한 것이니까 남이 복을 지어서 좋은 집에서 잘사는 것을 미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복을 짓고 그 복을 쌓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어른의 세계를 모르듯, 사람들은 능력의 세계만 알고 복력의 세계를 모릅니다.

능력의 세계만이 아니라 복력의 세계, 복력의 세계보다 더 큰 수행력의 세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세계만이 완벽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능력만 가지고는 오르내리는 윤회의 삶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 출처 ; 만불신문 44호(2001년 10월 15일자)

2011-02-18 / 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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