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접하면서 불교에 심취 현대적 시어 사용 선불교 정신 계승 붓다의 가장 수승한 가르침은 '희망'
기존의 시적 관습을 거부하며 파격적인 시작(詩作) 방법으로 문학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박남철 시인이 불교문예가 주관하는 제3회 〈불교문예〉작품상에 선정됐다. 황지우 시인과 더불어 기존의 시학 문법으로부터 뛰쳐나와 새로운 문법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파괴해 온 박남철 씨가 최근 시집 〈바다 속의 흰머리뫼(문학과 지성사)〉를 발표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초기 시에서부터 보여준 파격적인 해체적 시관(詩觀)을 지속적으로, 흐트러짐 없이 일관하고 있는 유별난 장인이자 시인이다. 그가 〈불교문예〉의 작품상에 선정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신선한 충격’이라는 평가다. 유원(幽遠)하고 고고(高古)하고 담박(澹泊)한 것을 통상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불교문단이 전통 시격(詩格)과 거리가 먼 박남철 시인을 선정한 이유는 어떤 연유에서 일까. 구랍 20일 인사동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시인이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시를 쓰게 된 경유와 새해를 맞아 불자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불교에서 선이 종지로 삼는 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사구게다. 선에서는 언어를 부정하지만 선과 언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불교문단에선 故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초현실주의 시·해체시와, 선시(禪詩) 또는 오도송의 공통점을 모색하는 작업이 꾸준히 전 개되고 있다. 박남철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기존 질서에 대한 파괴나 부정, 혹은 이를 타파하려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자유’ 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반시대적 고찰〉을 의식해서일까. (그는 시집 앞면 자서를 통해 제목을 ‘반시대적 고찰’로 붙였다고 해서 설마 니체적 사고를 읽는다거나 반시대적 고찰 로 읽을 독자는 없으리라고 강변한다) 그의 시를 살펴보면 그가 예술을 통해 니체적 사유 혹은 니체의 초인’적 인간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가 어떤 시대적, 공간적인 자아에 작용하는 일체의 모든 것들을 초월한 채 새로운 형식의 자아를 가진 고귀한 존재를 초인이라고 명명했을 때 디오니소스적이고 아폴론적인 양극단을 모 ‘두 지닌 그런 인간을, 그것도 예술적인 인간을 그는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니체의 자유란 잘못을 범하고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의 자유자재한 비약이나 언어를 통해 논리를 부정하는 이유 역시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문자를 뒤집어 놓는다든지, 사진·이모티콘을 사용해 논리를 거부하며 개념화를 벗어나 이미지화를 지향한다. 이는 기표(記表:signific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signifie 시니피에)의 대립관계를 끊임없이 초월하려는 선시禪詩)와 아주 흡사하다. 박 시인은 “언어는 기본적으로 논리의 도구이지만 선의 언어나 화두의 언어는 논리를 벗어난 데에서 그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제1분, 2)”며 “논리를 부정하고 비약하며 자유를 갈망하는 해체시는 선어와 무척 닮아 있다(5분간)”고 말했다. (심취하게 된 때는 〈금경경〉을 접하면서부터다. 그의 시 ‘제1분’에서는 당시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2006년 3월 어느날 나는 인터넷 상에서, 많이 거치른 번역인 듯한 〈금강경〉을 벼락치는 듯한 소리로 들을 수가 있었다. 가슴이 터져나갈 듯한 충격 속에 한동안 정신이 다 어질어질해지기도 했었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붓다’라는 위대한 스승과 조우하게 됐다고 시인은 설명한다.
“저는 불교를 종교로 받아드리기 보다는 붓다를 위대한 철학자, 내지는 인문학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위(人爲)를 강조한 공자와 무위(無爲)를 강조한 노자 사이에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中道)가 있어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道)를 깨우친 ‘붓다’의 가르침은 아주 위대합니다.”
그는 유불도 3교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궁극적인 주체성에 대해 궁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불교의 경우 공을 체득함으로써 해탈한 주체를 설명하기 때문에 유교와 도교가 지니는 한계점에서 벗어나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초기 시집에 비해 〈바다 속에 흰머리뫼〉에 수록된 시편들은 지극히 불교적이다. 시집 ‘바다 속에 흰머리뫼’의 해설을 쓴 김주연 시인은 작품 ‘아침 단상’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박남철 시인의 첫 고백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는 기독교적이기도 하고 불교적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아우구스티누스의‘인간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5월 3일 현재로 시작해서 유년으로, 신록이 푸르른 5월로 돌아오는, 이 시간은 5와 3이라는 숫자에 의해 과거와 미래가 현전한다.
그 시간을 재는 것은 오직 마음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본성을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으려 했다. 이는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에서 절대좌표계를 부정하는 논리와 같으며 의상대사의 ‘일념즉무량겁(一念卽無量劫)’과도 맞닿아있다.
또한 시인의 작품은 아주 속되고(난무하는 욕설, 인터넷 속어의 범람 ) 저급한 언어들이 즐비하지만 ‘흰머리매’‘철원, 미륵의 꿈’ ‘선인장’같은 시는 어둠속에서 처연히 동터오르는 일출처럼 삶을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성속일여(聖俗一如) 의 깨달음을 전하기도 한다. 시인의 시는 논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최초의 언어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는 일상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불립문자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보는 독자들은 스승의 ‘할(喝)’을 받은 제자처럼 당황스러워 한다. 그의 시 ‘독자놈 길들이기’를 보자.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 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 -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X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ㅇㅇ , 차렷, 헤쳐 모엿! 이 시는 언어를 부정하기 때문에 곧잘 이상한 행동으로 제자를 가르치려 한 선사들을 담았다. 그의 시가 불교적 관점에서 뛰어난 이유는 전통을 부정하는 실험시와 선시(禪詩)가 조우할 수 있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 있다. 그의 시세계는 선불교의 정신을 계승했으면서도 인터넷 언어나, 이모티콘 등을 사용해 낯섬을 무화시킨다.
〈육조단경〉을 단숨에 읽고는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현대시 문법을 통해 선시 형식의 모형을 개척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의상대사의 법성게의 한 구절인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을 떠올리게 된다. 찰나 속에서 영겁을 보는 시인의 눈은 모순을 부정하는 동시에 모순을 긍정하고 있다. 불교문예 선정 이유가 자유자재한 비약과 과단성이 불교의 정신과 상통한다고 밝혔듯 그의 시세계는 형식을 빌어 모유(妙宥)한 세계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진공(眞空)을 찾고 있다.
그는 첫 시집 ‘지상의 낙원’을 발표 했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붓다’적 세계관을 깨닫고 놀랐다고 한다. “1979년 ‘지상의 낙원’ 발표 후 30여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요.” 〈바다 속에 흰머리매〉 중 ‘나를 찾아서’는 십우도를 표방한 겁외의 노래이다. 이 시는 형식과 문법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지만 십우도의 깨달음을 오롯이 전하고 있다.
끝으로 새해 덕담을 구하는 기자의 질문에 박 시인은 붓다 가르침의 근원은 바로 ‘희망’이라며 새해에는 붓다의 가르침처럼 ‘희망’이 가득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 2년여 동안, ‘금강경’의 우리말 정본을 궁구하면서 법능 스님의 노래를 줄곧 들으며 용기를 얻었다”며 이렇게 읊조렸다.
절망하지 말자 멀지만 가야 할 길/ 오늘 비록 눈물일지라도 절망은 하지 말자/ 이 세상 모든 것 내게서 멀어져도 앞만 보고 가다보면 기쁜 날 오잖겠소/ 시냇물 흘러흘러 큰 강물 이루듯이/ 한 걸음씩 가다보면 새날은 오잖겠소….
<출처 : 주간불교 12월 27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