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원장 혜총스님은 지난 3월27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저소득 실직가정을 위한 1배 100원 108배 모금법회’에서 “이웃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임을 깨닫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자”고 당부했다.
국민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사회적 어려움을 같이 극복하기 위한 ‘자비나눔 법회’가 지난 3월27일 서울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3000여 개 사찰에서 봉행됐다. 이날 전국에서 동시에 봉행되는 ‘1배 100원 108배 모금법회’는 종단이 올해 핵심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자비나눔운동’의 일환이다. 조계사는 오후2시 포교원장 혜총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법회를 봉행했다. 혜총스님은 이 자리에서 “이웃을 위한 참회기도는 우리 모두를 위한 수행의 길”이라 전제하고 “보시바라밀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며 모두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는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며 108배와 등달기 운동을 통해 작은 정성을 보탤 것을 당부했다. 시간제한으로 법회대중들에게 전하지 못한 법문을 자료를 확보해 보완했다.
“고통 나누면 행복이 보입니다”
불자 여러분, 오늘은 종단에서 정한 ‘저소득 실직가정을 위한 1배 100원 108배 모금법회’ 날입니다. 오늘 하루 전국의 모든 사찰에서 이웃을 위한 108배를 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기도는 이웃을 위한 기도이지만, 동시에 우리 개개인을 위한 참회기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공업중생(共業衆生)입니다. 이웃들의 모든 고통은 나의 고통이며, 그 책임 또한 나의 것이며 우리 모두의 업(業)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갈수록 심각해지는 취업과 실업자 문제는 개인의 인생과 삶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가정 파괴, 사회공동체 파괴로 나타납니다. 총체적 경제위기, 자살, 범죄, 인성파괴 등 희망조차 포기하는 암혹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 성찰하고 연기적인 눈으로 세상을 살펴본다면 그 답은 자명합니다.
돈이 최고라는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져 올바른 삶의 태도를 잃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경제 논리만을 따져 무분별하게 환경과 생명을 파괴하여 인간 스스로 고립시켜 온 것은 아닌지? 주식이니 펀드라는 것을 통해 갑자기 많은 돈을 벌어보겠다고 욕심을 낸 것은 아닌지? 우리 아이만 좋은 학원, 좋은 대학 보내겠다고 아이들의 삶과 건강을 피폐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오늘 우리는 108배 참회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우리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하고자 합니다.
종정이신 법전스님께서 기축년 신년교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들수록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울수록 서로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고통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두타행(頭陀行)을 감수해야만 하는 가난한 이웃 중생들에게 보시행을 생활화하도록 합시다.” 종정스님께서는 어느 때보다 물적 심적으로 어려운 시대를 맞아 불자들이 보시바라밀로 보살행을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욕심에 재앙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오로지 적은 것에 만족하면서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며, 마음과 물질이라도 이웃과 나눌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보시행으로 수행정진 할 것이며, 이웃을 탐욕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깨달음의 길로 인도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깊이 되새겨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일찍이 ‘보시바라밀’을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하고 있으며 그 공덕(功德)의 과보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보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도록 합시다. 보시(布施)는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보(布)는 나의 재물을 나누어서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뜻이고, 시(施)는 자기 자신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산(散) 또는 사(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며
그 책임 또한 나의 것이며
우리 모두의 業입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보시바라밀로 최상의 지혜 증득하여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는
인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보시는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보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보시의 방법은 재시, 법시, 무외시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재시(財施)는 물질을 원인으로 타인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남과 더불어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할 때 현재는 따뜻하고 미래는 평화스러워짐이 재보시입니다. 이때 우리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을 명심해야 합니다. 보시하는 자와 보시 받는 자, 그리고 보시하는 물질이 모두 청정한 것, 즉 조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금강경>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제4’를 보겠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형색에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하되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 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대나 조건 등 이유를 달지 않고 보시할 때 진정한 보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법시(法施)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궁핍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좋은 말씀으로 그를 편안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고뇌하는 자로 하여금 마음의 평안을 얻도록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는 행위가 법보시인 것입니다. 돌아보면 주변에는 의외로 진리에 목말라 하는 마음 아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장황한 이론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마디라도, 마치 체한 사람에게 침을 한방 따끔하게 놓듯이 어리석음을 깨트릴 수 있는 한 마디가 아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범망경>은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보살을 일체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그가 구하는 온갖 것을 주어야 하는데, 만약 보살이 나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돈 한 푼, 바늘하나, 풀 한 포기도 보시하지 아니하며, 법을 구하는 이에게 한 구절의 법문과 한 마디의 게송과 작은 법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쁜 말로 욕설을 퍼붓는 것은 보살의 바라이 죄이니라.”
물질을 보시하면 얼마간의 고뇌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베풀면 평생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베풀면 큰 힘을 얻고, 입을 것을 베풀면 잘생긴 얼굴을 얻으며, 탈 것을 베풀면 안락을 얻고, 등불을 베풀면 밝은 눈을 얻으리라. 집으로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면 모두를 주는 것이고, 법으로 중생을 가르치면 감로(甘露)를 베푸는 것이니라. 감로는 세상에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요.”
셋째로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무외시란 다른 생명의 공포심을 제거해 주는 행동입니다. 즉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나의 자애로움이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고통에 대한 애정 어린 공감이 용기와 희망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넉넉지 않은 물질로도 가능하고 글자를 몰라도 할 수 있는 가장 종교적인 실천 원리입니다. 무외시를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면 여기가 곧 극락이 됩니다.
그래서 밝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 원리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생활논리입니다. 베푼다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시이며 대승에서 강조하는 이타적(利他的) 자비행의 근본인 것입니다. “보시하려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보시할 때에는 마음이 흐뭇하며, 보시한 뒤에는 마음에 후회 말라, 그리하여 우리의 어린애는 죽지 않으리. 주려 할 때는 그 마음 기쁘고, 줄 때에는 그 마음 흐뭇하며, 주고 난 뒤에는 그 마음 즐거워하라. 이것이야말로 참 자선(慈善)이니라.” (<본생경>) 보시는 모든 행(行)의 근원이며, 무명을 제거하고 열반의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위기가 기회라고 합니다.
삶이 힘들수록 자신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통해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비록 적어도 이웃과 나눔을 통해 깨달음의 길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특히, 어둠에 헤매는 자들에게 진리의 등불을 보시하는 것은 무지의 고통을 완전히 끊을 수 있는 최상의 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불자여러분! 오늘 이웃을 위한 108참회기도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며 수행의 길입니다. 보시바라밀로 최상의 지혜를 증득하여 모두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는 인연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