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없이 맑고 밝은 마음자리는 우주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보배다. 스님은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PR용 자기’를 버리고 보배를 찾기 위해서는 ‘마음의 밭’을 잘 가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음 밭을 잘 가꾸고 다스려야 합니다
허영심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만족’ 못 느껴
고뇌없는 삶 위해서는 小慾知足 할 줄 알아야
불자라면 누구나 ‘修息’을 소홀히 해선 안돼
어둠 속에서 더 곱고 빛을 발하는 연등은 신록이 찾아드는 도심 한 가운데서는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등으로서 기능을 갖기도 한다.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20여일 앞둔 지난 8일 수원 팔달사 안팎의 연등은 나그네의 발길을 한 발짝 한 발짝 부처님 품으로 이끌었다. 팔달사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과 팔달문 150여 미터(m) 인근에 있는 전통사찰. 창건한 지 90년이 채 안됐지만 근현대 선지식으로 널리 알려진 금오스님의 상좌 범행(梵行)스님과 그의 손상좌 혜광스님에 의해 도심 속의 포교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제5교구본사 속리산 법주사 주지를 역임한 중산혜광(重山慧光)스님은 수행자의 몸으로 1990년대 후반 국립공원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 분리징수를 주장하는 일부 시민사회단체에 맞서 불교의 입장을 대변한 주인공. 그 인연으로 주지 임기 후반에는 종단의 ‘국립공원관리위원장’의 소임을 맡기도 했으며 이후 국립공원 사찰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이 취임인사차 들러야 하는 곳으로 만들기도 했다. 역대 조사들이 수행과 땀방울로 가꾸고 지켜온 삼보정재를 후대에 올바로 전하기 위한 불가피한 소임이었지만 스님은 그 일로 ‘깐깐하고 강인한 분’으로 알려져 범접하기 어려운 수행자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도량정비 등 은사의 심부름을 위해 꿈꾸던 토굴생활을 짧게 줄이고 지난 2006년 6월 팔달사 주지 소임을 맡은 혜광스님은 주변의 3층 건물을 사들여 교육관으로 개축하는 등 도량을 나날이 새롭게 가꾸어가고 있다. 도량정비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송을 당해 마음고생을 한 스님은 “뜻하지 않은 소송으로 싸움 아닌 싸움을 하다 보니 인상까지 변해가는 것 같다”며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가며 법석을 이끌었다.
“지금 시대를 ‘자기 PR(광고)시대’라고 하잖아요. 자기가 자기자랑을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어요.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거든. 속된 말로 ‘덜 떨어진 놈’이라고 했잖아요? ‘덜 되도 아주 덜 됐네.’ 하면서 흉을 봤는데 지금은 자기PR을 못하면 바보취급을 해버리는 경우도 있단 말입니다. ‘내가 이렇소.’ 하는 식의 과대포장이지.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방법이지만 그로 인해 자칫 거짓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기 모습이 아닌 가아(假我)로 살아가는 것이죠.”
스님은 가아(假我)가 주인이 되어 진아(眞我)를 잠식해가는 이런 때일수록 ‘수식(修息)’을 통해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음의 밭(心田)을 잘 가꿔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용심(用心)을 잘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출가수행자에게 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세상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닦지 않으면 번뇌(煩惱) 때문에 자기본성(自己本性)을 잃는 수가 많습니다. 번뇌는 잡초와 같아서 뽑지 않으면 곡식을 올바로 수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청정(淸淨)한 것인데 눈을 뜨고 사물을 봤을 때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생겨서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더욱 커지고 그로 인해 고뇌(苦惱)가 생기는 것입니다. 고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분수를 지키는 소욕지족(小慾知足)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스님은 “허영심(虛榮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만족을 못 느끼고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며 ‘행복의 길’을 안내했다.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안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마음은 닦지 않으면 수식(修息)이 될 수 없는 것이라서 마음을 쉬기 위해 수행자들은 고행길일지라도 평생토록 쉼 없는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도(道)를 닦고자 하는데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재(財) 색(色) 수(睡) 명(名) 식(食) 오욕락(五慾樂)에 탐닉되어 있고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욕락을 제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만 자제력은 스스로 내면적 수행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수행을 거듭하는 선지식(善知識)을 존경하고 부처님같이 받드는 것입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스님은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을 읊으며 법문을 이어갔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나 오직 간택을 꺼릴 뿐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심이 없으면 명백하리라. 분별심과 번뇌망상이 사라지면 일초직입여리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 생각 뛰어넘으면 부처의 경지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바라거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근수정진(勤修精進)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 마음을 잘 다스리고 통제력을 키워야 하며 고요를 원한다면 몸과 마음가짐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만심을 가질 수 있고 어려움을 당해서는 실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자기본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란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상을 바로 알면 크게 발심(發心)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님은 ‘무상’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고 첨언했다.
“무상(無常)은, 세상에 있는바 모든 것은 잠시도 머물러있지 않고 생멸(生滅)이 있으며 변천(變遷)이 있는 것이어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상의 이치를 잘못 알면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알면 크게 발심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옛 선사(禪師)들이 촌음(寸陰)을 아껴 쓰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시간은 유수(流水)와 같아서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특히 수행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귀중한 것입니다. 인간은 다 행복해지질 바라는 동시에 번뇌가 없기를 바랍니다. 고뇌 없기를 바라거든 먼저 마음을 닦으라 했습니다. 마음을 닦아 지혜(智慧)가 생기면 무명(無明)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광명(光明)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불을 밝히는 순간 캄캄한 어둠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무명은 번뇌입니다. 번뇌를 없애는 것은 지혜로서만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혜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를 끊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수식과 정진을 통해서만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자라면 특히 마음을 닦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혜광스님은…
창건 90년 앞두고 교양관·선방 신축
도심 속 ‘포교·수행도량’으로 일궈가
팔달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 성곽과 팔달문 인근에 있는 전통사찰이다. 1922년 건립당시에는 주변에 민가 조차 없는 팔달산의 작은 암자였지만 지금은 도심 속의 포교수행도량으로 기능을 갖춰 가고 있다.
현 조실 범행스님이 제2대 창건주 및 주지로서 불사를 일으켜 도량을 약 5000평방미터(㎡)로 확장하고 이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산재된 각 필지 및 지번 등을 혜광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정비, 하나의 종교용지로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선방과 함께 요사채를 신축하는 한편 새로 매입한 건물은 교양관으로 개축해 교육과 수행 공간을 갖춘 도심 속의 포교.수행도량으로 일구어 가고 있다.
194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혜광스님은 1955년 봉은사에서 범행스님을 은사로 출가, 같은 해 봉은사에서 총곡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63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은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봉은사와 대구 동화사 등의 제방 선원에서 수선 안거하는 가운데 해인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행정대학원과 불교대학원 고급관리자 과정에 들어가 종무행정과 포교에 필요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제5교구본사 법주사 주지를 비롯해 경주 석굴암, 군산 은적사, 남원 실상사, 완주 화암사 주지와 제11대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법주사 주지 재임 때는 국립공원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 합동징수와 분리징수 논란 속에 국립공원관리위원장을 맡아 삼보정재를 지켜내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