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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 공중사리탑 국가문화재로 지정돼야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정영호 관장, 낙산사 소장문화재 포럼서 주장


[사진]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이 공중사리탑에서 사리를 수습해 보이는 모습


2005년 4월 5일 식목일, 강원 양양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천년고찰 낙산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원통보전 등 20여 채의 건물이 전소됐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에서도 낙산사를 지켰던 세조대왕이 조성한 동종(보물 제479호)은 처참히 녹아내렸다.

그로부터 4년, 낙산사는 국민적 관심과 지지 속에 새로 건물이 세워지고 나무가 심어졌다. 복원 과정에서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되면서 공중사리탑이 새롭게 조명된 것을 비롯해 조선시대 유구가 발굴됐다. 화마를 이겨낸 천년고찰 낙산사는 김홍도 그림을 근거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며 새 천년을 바라보고 있다.

양양 낙산사(주지 정념)는 4월 10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낙산사 화재 4주년,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낙산사 소장문화재를 학술적으로 조망하는 포럼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500여 사부대중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한국 미술사학계의 원로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을 비롯해 김상현ㆍ김창균 교수(동국대), 박상국 문화재위원, 조효숙 교수(경원대), 윤열수 가회박물관장 등이 발표했다.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은 기조강연 ‘낙산사 공중사리탑의 사리장엄’에서 “낙산사 공중사리탑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국가적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관장은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오래전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일찍이 스승 황수영 박사(동국대)도 1953년 공중사리탑을 찾았을 때, 탑이 쓰러진 모습을 도굴배들의 만행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낙산사 한켠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공중사리탑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산불 때문이었다.




[사진] 낙산사 공중사리탑에서 수습된 진신사리

정영호 관장은 “공중사리탑 사리장엄은 화마 때문에 발견됐다”며 산불의 영향으로 각부 석재의 손상을 복원하고 탑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해체했던 과정을 설명했다.

2006년 4월 28일 오전 9시 30분경, 보수 중이던 공중사리탑 탑신석 상면 중앙의 원형 사리공(직경 23cm, 깊이 17cm)에서 부처님사리로 추정되는 사리장엄이 발견됐다.

사리장엄은 노란색 비단 보자기에 싸인 원형의 청동함 내에 4겹의 노란색, 푸른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그 안에는 연분홍색 비단 3매로 빈틈없이 에워싼 가운데 모셔진 원형 은제함이 놓여 있었다. 은제함 안에는 2겹의 푸르고 누런 색의 길상문과 만(卍)자 등 갖가지 무늬를 장식한 비단에 싸인 금제함을 4꼭지의 다라니가 보호하고 있었다. 금제함 안에는 색동 비단 1겹에 싸인 자주색 사리호가 있어,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흰색 명주솜 보료 위에 봉안했다.

공중사리탑에서는 원형 청동합과 은제합, 금제합을 비롯해 각각의 합을 쌓았던 비단 보자기 8점, 다라니 19장과 불탑봉안문 4장 등 20여 점의 문화재가 발견됐다.

정 관장은 “공중사리탑의 사리는 신라시대부터 봉안된 부처님 진신사리가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공중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가 진신사리만의 고유한 빛깔을 갖고 있고, 진신사리가 아니라면 둥근 형태의 큰 사리공에 모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다.

1959년 팔공산 송림사5층석탑, 1966년 황룡사 9층목탑과 불국사 석가탑, 1970년대 월정사8각9층석탑과 무량사5층석탑, 도리사 세존사리탑 등.

정영호 관장은 “공중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이제껏 보아온 진신사리와 같은 빛깔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 관장은 “둥근 형태의 큰 사리공은 사리장엄을 갖췄기 때문”이라며 “스님 중에 큰 사리공을 갖춘 것은 양양 진전사의 조계종 종조 도의 국사 부도가 유일하다. 이 또한 네모형태”라고 설명했다.

‘공중사리탑’이란 이름은 홍련암 인근 ‘해수관음공중사리탑명’이라 적힌 2.15m 높이의 탑비에서 유래됐다. 공중사리탑의 청동합에서 봉안문에는 ‘강희삼십일년용집임신유월초십일’이라며 탑의 조성시기를 숙종18년(1692)으로 기록했다. 탑비의 조성연대는 숙종20년(1694), 사리를 모신 때를 숙종9년(1683) 등 봉안기의 내용과 일치된다.

탑비에는 “홍련암에서 개금불사를 모실 때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처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떨어졌다. 유리처럼 광채를 냈던 구슬을 구습해 탑을 쌓고 봉안했다”고 적었다.

정영호 관장은 “의상대와 망망 동해를 굽어보는 대지에 건립된 사리탑을 ‘공중사리탑’이라 부른 이유는 석비에 따른다”며 “숙종18년(1692) 조성된 것이 확실한 사리탑은 탑신석이 원구형인 것을 볼 때 신라 이후 고려, 조선초기 등 특수형 부도 형태를 갖는다”고 말했다.

선산 도리사 세존사리탑처럼 신라시대의 부처님 사리를 후대에 이르러 다시 사리탑을 건조하고 모시는 예는 있어도, 공중사리탑처럼 온전한 사리장엄을 갖추고 건립의 절대연대까지 알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정 관장은 “사리탑 건립의 절대연대가 분명하고 탑신 각부의 건조양식과 조각수업이 뛰어나 당시의 석조건축물을 대표할만하다”며 “사리탑과 사리장엄을 비롯해 함께 발견된 보자기, 보료 등 비단 견직물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연구와 보존책이 강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효숙 교수는 주제발표 ‘낙산사 공중사리탑 복장직물의 조형성 연구’에서 “청동합부터 사리호까지 싼 보자기 일체가 발견된 경우가 드문데 공중사리탑은 사리장엄구를 싼 보자기 8장의 상태가 모두 양호하다”며 “특히 사리호를 싼 격자무늬 보자기는 여러 층으로 짠 중조직으로 처음 발견돼 직물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조 교수는 “공중사리탑에서 발견된 직물유물들을 재현해 낙산사의 문화컨텐츠 자료로 활용해 문화상품을 만들자”고 제안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편, 이날 김상현 교수는 ‘낙산사의 문화사적 위치’를, 박상국 문화재위원은 ‘낙산사 공중사리탑의 사리신앙과 봉안문서’를, 김창균 교수는 ‘낙산사 공중사리탑 내 발견 사리장엄구에 대한 고찰’을, 윤열수 가회박물관장은 ‘그림속에 나타난 낙산사’를 발표했다.


<출처 : 붓다뉴스 0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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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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