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전국 선원에서 하안거 결제에 들어갔다. 하지만 전국 사찰에는 해제와 결제가 따로없이 정진하는 스님들이 많다. 하안거 결제를 맞아 경남 합천댐 인근에 위치한 ‘행복한 절’을 찾았다. 특이한 출가 이력을 가진 은산스님은 지난 4월 1000일 기도정진을 마치고, 다시 1000일 정진에 들어갔다.
하안거 결제에 만난 ‘행복한 절'은산스님
수행자는 1년 365일이 ‘결제’
천일기도 회향 후 다시 입제
부처님오신날 준비가 한창이던 4월29일 행복한 절을 찾았다. 주지 스님은 이제 39살 된 은산스님<사진>이다. 적어도 예순이 넘고 종단에 널리 알려진, 신도들이 모두 ‘큰스님’으로 모시는 스님이 아니다. 한 때 30~40대에 조실을 하고 20대에 큰 절 주지를 하던 때가 있었다. 나이나 선방 장판 때를 얼마나 오래 묻혔느냐 보다 수행력으로 평가해야한다는 이상적인 잣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도 29살에 출가해 35세에 득도했으며 제자들 중에는 부처님 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그 때’ 이야기다. 이제 세속의 나이와 출가 햇수가 기준이다. 법력 도력 같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잣대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면이 있다. 나이가 들고 오래되면 젊은이들과는 다른 무엇이 생긴다. 젊어 촉망받던 인재가 정상의 자리에 오른 뒤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산전수전 다 겪고 정열의 불꽃도 사그라 들 무렵 인생 무상의 진리를 깨친, 주름 깊게 패인 노안(老眼)만으로도 평안과 믿음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늘 은산스님을 찾는 것은 스님의 짧은 인생과 수행력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원하지 않았지만 세속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스님의 이력을 더듬지 않을 수가 없다. 은산스님은 이제 출가한지 15년 가량 됐다. 이제 본사 국장 소임을 볼 나이다. 종정을 역임한 혜암스님 회상으로 출가했다. 출가시킨 사람이 그의 부모다. 그의 부모는 스님이 군복무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세 명이 한꺼번에 세속을 떠났다. 제대하는 날 부모가 곧바로 이혼서류를 제출하고 입산했으니 두 사람이 그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헤아리고 남는다. 위로 6명의 누나 중 세 명도 출가했다.
모두 부모의 교육 덕분이다. 그의 어머니는 공부를 하거나 TV를 보는 어린 아들에게 “참나를 알지 않고는 너의 인생을 알 수 없다”는 훈계를 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야 한다거나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보통의 어머니가 들으면 까무러질 일이다. 젊을 적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두 사람은 늘 좌선을 하거나 아이들에게 참 나를 찾으라는 법문을 했다. 자식들 모두가 출가하기를 원했던 두 사람은 자신이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 하자마자 바로 바라던 길을 걸어갔다. 올해 76세인 부친 만각스님은 지금도 해인사에서 정진하고 있으며 어머니 혜광스님은 얼마 전 입적했다.
스님을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가족사 때문이 아니다. 스님은 얼마 전 1000일 기도를 마쳤다. 산문을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눕지 않고 가사 장삼도 벗지 않은 채였다. 4월에 1000일 기도를 마친 스님은 그날 다시 1000일 기도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꼭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하루 일정으로 외출은 하기로 했다.
왜 1000일 기도를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했다. “어떤 계획이나 목적을 세워서 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천불전 및 수련원 건립불사를 위한 정진을 하는데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모두들 느슨해지는 것 같아 갑자기 법상에 올라 ‘오늘부터 눕지 않고 가사 장삼을 벗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처음 일주일은 앉아서 잔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는데 곧 적응이 됐다”며 “결국 잘 때는 누워야한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인식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왜 절 이름을 ‘행복한’이라고 지었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우리는 원래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행복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깨달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를 모르는가. “망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망설인다. (스님은 찻잔을 들어보이며) 그냥 이렇게 들면 된다.”
스님은 “망설일 시간이 없다. 세상은 전 지구적으로 어렵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법시대가 지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빠르고 적극적이다. 상황이 단순해져 길이 훨씬 잘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불과 10여년전 만해도 사람들은 진리를 이야기 하면 심드렁하거나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만 말을 던져도 금세 알아듣고 적극적으로 질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동국대 재학중 지도 법사를 맡았던 서울 포교당에서 7명의 학생을 출가시켰으며 원당암 수련회 지도 법사를 하면서 3~4명씩 산문으로 보냈다. 지금 행복한 절에도 출가를 준비하는 수련생들이 다수 있다.
스님은 이를 이렇게 말했다. “이 우주는 자비롭다. 무너 뜨려서 알게 끔 만들지 않느냐”
스님은 어떻게 그런 많은 사람을 그렇게 쉽게 출가시키는 것일까. “사람들이 힘들다고 혹은 고민을 상담하러 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깨닫게 해드릴까요. 상대방이 ‘예’합니다. 그러면 곧바로 ‘출가하십시오’합니다. 그 순간 상대방의 머릿속에는 아주 많은 상념이 떠오릅니다. 그게 바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지요” 출가를 결심하는 순간 부모 자식 명예 부 욕정 이런 것들을 포기해야한다는 절망감이 뒤 따른다. 출가는 곧 그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삭발염의해서 독신수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를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찻잔을 들 듯이….
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쉽게 그리고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결론은 한결 같았다. ‘지금 당장 행복하십시오.’
행복한 절 전경.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이 사단법인을 만들어 절을 만들었다.
은산스님과 ‘행복한 절’
신도들이 사단법인 만들어
스님의 명성은 소리 없이 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찾아와 상담을 하고 간 뒤 열렬 신도가 됐다. 이들이 사단법인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 행복한 절을 창건해 스님을 모셨다. 법당과 수련생들 숙소 두 동으로 이루어진 행복한 절은 곧 수련관을 건립한다. 신도들 스스로 원력을 세우고 돈을 모으고 있다. 사찰 재정도 이들에게 모두 맡겼다.
스님은 “수행자는 내가 행복해지는데 그치지 않고 남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며 “저자 거리에 나와 신도들을 만나고 상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사 스님은 스님이 갈 길을 미리 알았던가. 혜암스님은 은산(隱山) 이라는 법명을 지어주며 “저자 거리에서도 흔적이 없는 마음이 진정 숨는 것”이라도 풀어주었다고 한다.
지난달에는 어느 중앙일간지가 스님을 인터뷰 해 소개했다. 그 뒤로 지역에서도 소문이 널리 퍼졌다.
결제를 맞아 불교신문 독자들에게 보내는
은산스님의 메시지 (요약)
모든 것은 마음 따라 원하는 만큼 이뤄진다.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이며 해결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원하는 정도만큼 해결될 뿐, 믿고 원하는 만큼 이뤄질 뿐, 마음 낸 만큼 펼쳐 질 뿐, 똑 부러지는 고정된 해결 방법은 없다. 그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방편 또한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갈구하는 수행자가 스승에게 자신의 번뇌가 치성하여 공부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음을 토로하자 스승은 ‘좀 더 노력하라’고 경책한다. 한 제자는 ‘번뇌가 치성해서 공부법이 제대로 적용이 안되는데 어떻게 더 노력하란 말인가, 스승은 나의 마음을 모른다’고 푸념한다. 다른 제자는 ‘좀 더 노력하면 되겠구나’라며 더 공부한다. 공부 진전이 없는 이유를 번뇌 탓으로 돌린 첫 번째 제자를 보다 못한 스승이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너더러 번뇌와 씨름하라 했더냐? 알려준 공부법을 열심히 하라고 했지.’
돌아가지 않는 마음, 뒤로 미루지 않는 마음, 이 마음이 행복을 성취하는 마음이며 깨달음의 마음이다.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원래 우리는 부처라는 사실을 진실하고 순수하게 믿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을 좀 더 희생하여 남을 위할 줄 아는 실제로 행하는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보리심을 토대로 진실한 믿음을 일으켰을 때 다른 이들의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들에 대해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인정할 줄 알게 되며, 보듬을 줄 알게 되며 자비심으로 지혜의 길을 안내 해 주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깨달음의 인연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믿을 줄 알게 되어 깨달음의 인연의 진실함을 급기야 알게 된다. 마치 스승의 ‘좀 더 해라’란 말씀이 사실 그대로 진리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