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핵심은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종교가 불교요, 지혜와 자비가 두 바퀴가 되어 큰 수레를 잘 굴러가게 하는 종교가 대승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양족존(兩足尊)’이라 칭합니다.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불자(佛子)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아버지를 닮기 위해, 아버지인 부처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곧 자비와 지혜를 함께 갖춘 거룩한 인물이 되고자 노력하는 존재가 불자입니다. 지혜가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계발하는 것이라면, 자비는 ‘나’ 밖의 세계 또는 대인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지혜가 자리(自利)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자비는 이타(利他)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자연히 자리인 지혜가 원만히 갖추어지면 이타인 자비를 지혜롭게 발현시킬 수 있고, 이타행인 자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의 삶이 크게 열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목표는 지혜와 자비를 함께 갖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개인의 수행이나 능력과 함께하는 것이므로, 오늘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자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자 노력하라 ◐ ◑ 자비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몸과 말과 뜻, 곧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흐뭇하고 고맙고 보탬이 되는 생활을 하고 말을 하고 마음을 쓰는 것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마치 봄 기운과 같은 것입니다. 만물이 봄 기운을 받게 되면 얼음도 녹고 풀도 돋고 꽃도 피어나듯이 자비의 기운을 받으면 인생도 더불어 활력을 얻게 됩니다. 삭막하던 현실에 봄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자비심은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항상 사랑을 베풀고 잘못한 것을 너그럽게 이해하며 바른 길로 이끌고 큰 잘못까지도 능히 용서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정말 가난하고 못 배우고 불행하고 병들고 부족한 이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어루만져주고 다독거려주고 보탬이 될 수 있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마음 한번 써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나 힘 있는 내가 나보다 모자라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자비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나보다 모자란다’, ‘부족하다’, ‘너는 돈이 없다’, ‘너는 인물이 못생겼잖아’, ‘너는 벼슬이 없고 나보다 아래잖아’ 이러한 생각이 있으면 올바른 자비가 발현되지 않습니다. 베풀면 나에게 큰 복이 돌아오고, 기분이 좋아지고, 득을 보기 때문에 베푼다는 식의 행위라면 어찌 자비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스스로를 자비로운 모습으로 포장하여 남에게 돋보이고자 하는 위선적인 행동이라면 오히려 죄업이 될 뿐입니다. 진실로 자비심이 깊은 사람은 진실을 외면한 거짓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생각합니다. 불성(佛性)을 지닌 거룩한 분, 장차 부처가 되실 분으로 봅니다. 무학 대사의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으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로 보인다.”는 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자 노력하여 부처님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추게 되면 그에게는 미운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으며, 나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8정도의 정견(正見)이며, 부처님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가지가지의 방편을 쓰신 것입니다. ‘남편불’, ‘부인불’, ‘아기불’, ‘시어머니불’, ‘며느리불’ 등 모두가 부처님처럼 보이는데 어찌 부처님을 받들듯이 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배고프다’ 하면 공양을 올릴 일이요, ‘아프다’고 하면 정성껏 돌볼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비입니다.
아상(我相)을 없애는 최상의 방법은 하심(下心) ◐ ◑ 그런데 중생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미운 사람, 싫은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내면세계에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의 내면세계가 미움의 요소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미워합니다. 실로 세상을 살다보면 가까이에 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미운 사람이 또 생깁니다. ‘저 미운 놈! 다른 데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하다가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내 마음자리에 또 다른 미운 놈이 들어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운 놈’을 쫓아버리기보다는 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의 요소를 자비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미운 그를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장차 부처될 분으로 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한가요? 미운 놈을 불쌍히 봐주기가 쉬운가요? 부처님처럼 보는 것이 가능한가요? 보통 사람이라면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미워하며 살아야 할까요?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하심(下心)입니다. 아상(我相)을 멈추게 하는 하심이라는 약을 써야 합니다. 대인관계의 모든 문제는 나를 과시하면서 상대를 깔보거나 무시하는 아상에서 비롯됩니다. 이 아상의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삼악도(三惡道)의 바다는 깊어만 갑니다. 아상으로 남을 미워하고 무시하게 되면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요, 자비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상이 치성하면 깨달음을 이루는 공부에 진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상이 가득 차 있으면 본래의 깊은 자비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상을 없애는 최상의 방법인 하심을 강조하셨습니다. 하심이 무엇인가? 나를 남 아래에 둘 수 있는 마음입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밑에 있겠다는 마음입니다. 가장 밑에 있으면서 일체 중생을 부처님처럼 받들며 살겠다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하심을 하는 이의 마음이 어찌 자비롭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맑게 깨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발심자경문』에도 “범유하심자 만복자귀의(凡有下心者 萬福自歸依)”라고 하여, “무릇 하심을 하는 자에게 온갖 복이 저절로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아상이 무너지고 하심만 잘 되면 모든 존재가 차츰 부처님으로 보일 수 있게 됩니다. 하심만 잘 되면 저절로 자비로워지고 만복(萬福)이 스스로 귀의합니다. 온갖 행복이 저절로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남이 모두 잘 살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불국토로 만들려면 하심을 하면서 자비를 실천하면 됩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대자비와 하심을 통하여 그분들의 불국토를 이루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범부인 우리에게는 무연(無緣)의 대자비를 실천하기가 쉽지도 않고 남을 부처님처럼 떠받드는 하심을 완성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면상무진공양구(面上無瞋供養具)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구리무진토묘향(口裡無瞋吐妙香)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심리무진시진보(心裡無瞋是眞寶)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무염무구시진상(無染無垢是眞常)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이 게송은 문수동자께서 당나라 무착 선사에게 일러준 것입니다. 이 게송 속의 ‘성 안내는 그 얼굴’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야말로 우리가 능히 실천해야 하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불국토로 바꾸어 놓는 첫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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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 스님 _ 1943년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13세에 동진출가했다. 동화사에서 일타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62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동화사 금당선원을 비롯한 제방선원에서 10안거를 수선하면서 선교를 겸수하였다. 1971년에는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서 200일 동안 하루 5천 배씩 절 수행을 하며 100만 배 기도를 성취했다. 대흥사와 해인사 교무국장, 제주 관음사 주지를 역임했고, 1981년부터 약천사 건립불사를 추진해 제주도를 대표하는 명찰로 가꾸었다. 현재 약천사와 단양 광덕사 회주로 주석하며, 광덕사의 대규모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심』, 『원력』 등이 있다.
<출처 : 월간 불광 05월 13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