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하고 자상했던 큰 형은 네팔의 민주 활동가들의 리더였다. 막내였던 그도 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에 몸을 담았다. 둘은 정부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1990년 5월, 당시 19살이었던 그는 형과 함께 갑작스레 집에 들이닥친 경찰에 체포됐다. 손목이 묶인 채 끌려간 곳은 마을 공터. 같은 이유로 체포된 30여 명의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이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총알을 피하려 무작정 달렸다. 앞서 달리던 형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형을 부르려는 찰나 왼쪽 머리에 총을 맞고 그 역시 의식을 잃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끔찍한 기억이다.
8월 27일 심장병의 일종인 확장성 심근병증으로 투병중인 네팔 이주노동자 바하두르 씨(39)를 만났다.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복부에는 물이 차 부어오른 상태에서도 그는 “그래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감사함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의아함도 잠시, 그가 밭은 숨을 고르며 꺼낸 20년 전의 이야기에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머리에 남은 선명한 흉터 자국, 그는 이미 죽음의 순간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후유증으로 실명돼 초점을 잃은 왼쪽 눈을 어색하게 문지르며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과 함께하는 삶은 부처님의 가피로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형이 죽은 후 의식을 잃은 그는 인도의 한 병원에서 눈을 떴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1년간의 기나긴 치료를 마쳤지만 더 이상 네팔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왔다. 1992년, 20살이 갓 지난 청년이었다. 삶의 끝자락을 경험한 그였지만 인생은 여전히 힘겨웠다.
“한국에 와서 작은아버지와 겨우 연락이 됐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누가 집에 불을 질렀대요. 모든 것이 다 제 탓인 것만 같아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대한 집착이 돼 버렸어요.”
개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고, 왼쪽 눈의 장애를 숨기고 일할 수 있는 공사판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당시 그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편히 잠을 자지도, 배부르게 음식을 먹지도 못하는 삶을 살았다. 하루하루 시들어 가던 그를 잡아 준 이가 바로 지금의 아내 이 모(40) 씨. 아내는 문맹이다. 그리고 우울증을 겸한 약간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가정을 꾸렸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자식들도 무럭무럭 자랐다.
바하두르 씨는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혼자 아내의 병든 노모까지 5명의 삶을 책임져야 했다. 일을 하는 날보다 일거리가 없는 날이 더 많아 힘든 생활이었지만, 사람 사는 작고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지난해 말에는 운 좋게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점점 나아지는가보다 했다.
그러나 다시 고비가 닥쳤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벌어들이는 돈이 없으니 자연 생활이 어려워졌고, 고3인 큰딸은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하고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 그 즈음, 그는 병원에서 심근병증 진단을 받았다. 가만히 서있어도 숨이 차오르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밀린 월급을 포기할 수 없어, 약을 복용하며 일했다. 그러던 지난 8월 8일, 결국 급성 호흡곤란과 우심실 기능 저하에 따른 복수로 인해 병원에 입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내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일하는 사람이 없어서 쌀도 못사고 있습니다. 거기다 병원비까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에게 있어 가족은 삶의 이유 그 자체다. 형과 부모님의 죽음을 말할 때에도 담담했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나마 보험 덕에 바하두 씨가 부담해야 하는 병원비는 70만 원 가량. 그러나 그것조차 그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금액이다. 희망이 있냐는 물음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가족들이 끼니를 해결 할 수 있고, 내가 나의 병원비를 낼 수 있기만 바라요. 그것이 나의 희망이예요.” 복수가 차 비정상적으로 부어오른 그의 배 위 병원복이 어느새 절박한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흠뻑 젖어들었다. 농협 032-01-183035 (주)법보신문사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