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   지난호 보기  |   웰빙음식  |   좋은 글  |   음반/서적  |   울림이 있는 이야기  |   배경화면
만불사 홈 > 붓다의 메아리 음반/서적
   통합과 겸손의 정신이 담긴 충청도 폐사지 아홉 곳 [불교도서] 2013-01-21 / 3343  

 

충청남북도의 폐사지 아홉 곳을 걷다

전국에는 5,400여 곳의 폐사지가 산재해 있다. 이미 오래전 법등이 꺼진 이들 폐사지에는 몇몇의 석조 유물들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남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자 이지누는 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오랜 세월 전국의 주요 절터를 수차례 답사해왔다. 여러 장소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특히 같은 장소라고 해도 시간대별로, 계절별로 반복해 답사함으로써 절터의 진면목을 그려내기 위해 애써왔다. 더구나 충청도 절터의 경우에는 저자의 공부방이 있는 수도권 지역과 그리 멀지 않아 훌쩍 오가기를 옆집 가듯 했다. 이는 얄팍한 감상과 흔한 자료가 뒤섞인 답사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넓이와 깊이를 이 책에서 기대하게 한다.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는 그렇게 온전히 저자의 머릿속에 그려진 충청도 절터들 가운데 아홉 곳을 세심하게 선별해 다뤘다. 보령 성주사터부터 책의 여정을 시작해 서산 보원사터, 당진 안국사터, 제천의 사자빈신사터와 월광사터, 충주의 미륵대원사터, 숭선사터, 청룡사터, 김생사터까지 충청도 절터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저자는 때로는 시적인 감상으로, 때로는 설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때로는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료로 절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또한 현장의 느낌을 실감나게 전달함으로써 독서의 흥취를 더한다. 사진들은 단순한 현장 스케치가 아니라, 한컷 한컷이 글과 어우러지면서도 독자적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발산한다. 이를 통해 일반인의 눈으로는 무심히 건너뛰기 쉬운 충청도 절터의 진면목을 순례자의 맑은 눈으로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통합과 겸손, 그리고 깨달음

전라남도의 절터는 분방하고 아름답다. 전라북도의 절터는 고요하고 성찰적이다. 그렇다면 충청도 절터만이 간직하고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그 실마리는 책 제목에서 풀어나갈 수 있다. 제목에 쓰인 문구인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라는 향기로운 말을 내놓은 이는 낭혜화상(801~888)이다. 보령 성주사터에 주석했던 그의 공부 이력은 선종과 교종을 두루 아우르는 것이었다. 북종선 계열인 능가선부터 시작해, 화엄도량인 부석사에 가서 머물고, 당나라로 건너가 남종선 계열일 마조선까지 섭렵했다. 곧 보수라고 할 수 있는 화엄사상의 교종과 진보적 성향을 가진 선종의 여러 갈래를 넘나든 것이다. 더구나 낭혜화상은 불문에 들어서기 전에는 유가의 경전을 읽기까지 했으니, “진주를 얻고 불을 피웠으면 조개와 부싯돌은 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수행 태도였다.

이러한 원융圓融의 정신은 비단 성주사터뿐만이 아니라 충청도 절터 전반에 흐른다. 이는 한반도에서 충청도가 차지하는 입지 조건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충청도는 한반도 남쪽과 북쪽을 잇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였다. 당시의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강줄기를 타고 여러 불교 종파들이 충청도에 속속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서로 대립하는 동시에 공존의 노력도 이어졌다. 더구나 고려 당시에는 교종을 통치사상으로 내세운 중앙정부가 지방의 선종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충청도 지역에 화엄사찰들을 여럿 세우기도 했으니, 그 만남과 통합의 과정은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죽산-충주 국도변에 산재해 있는 고려 전기 양식의 거대한 석불입상들이 고려 중앙정부(교종)와 호족세력들(선종)의 과시적 합작품이라면, 고려 양식과 통일신라 양식이 조화롭게 녹아 있는 서산 보원사터의 탁월한 5층석탑은 그 통합의 예술적 극치다.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과 마주칠 때 대립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겸손해진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과 기존의 생각을 모순 없이 통합해 더욱 완전한 모습에 이르고자 한다. 이를 불교적으로 풀면 너와 나의 분별이 없는 경지, 곧 깨달음의 경지다. 충청도의 절터에는 이와 같은 사상과 통찰이 면면히 깔려 있다. 독자들은 이들 절터의 흔적을 찬찬히 더듬어봄으로써 불교의 역사ㆍ문화ㆍ사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한편, 오늘날 한국의 이념 대립 현상에 대한 시사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감이 어우러지는 감각의 향연

이 책의 주요 축인 사진은 절터 현장을 매우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멋이나 장식, 기교 등을 배제하고 담백하게 현장을 담았다. 이는 디지털 기술로 사진을 예쁘게 보정하는 경향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한편, 실제 그대로를 찍어도 얼마든지 품격 있는 사진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한컷 한컷이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는 사진을 수십 번의 답사를 통해 얻어냈다. 그야말로 ‘발로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진수다. 자연의 햇빛을 통해 담아낸 절터 현장의 색감과 질감은 독자의 시각과 촉각을 즐겁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글에서는 청각과 후각이 특히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저자는 제천 월광사터에서 “마른 낙엽 위로 또다른 낙엽이 떨어져서 서로 부딪는 소리”(193쪽)에 주목하며, 그 “가을 햇살처럼 투명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탐미적인 청각의 향연 뒤에는 이를 관음觀音 또는 관청觀聽 사상과 연결시키며 감성의 깊이를 그윽하게 더한다. 또한 당진 안국사터에서는 “잎들 마르면서 나는 향기가 새벽의 눅진한 공기에 묻혀서 하늘로 떠오르지 못하고 절터에 가득 차 있었다”(107쪽)며 후각적 즐거움에 흠뻑 젖는다. 이곳에서 역시 안국사터의 매향 및 미륵사상을 고려해 “돌미륵이 하생한 것을 기뻐하며 온 산의 나무들이 자신의 몸을 흔들어 스스로가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향기를 내뿜는 것만 같았다”며 감성과 지성이 어우러진 표현을 일궈낸다.

이처럼 저자는 책 곳곳에서 화려한 감각의 향연을 펼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탐미적 경향은 타락이나 파괴로 흐르지 않고, 찬탄이나 경건함으로 이어진다. 그것이야말로 절터의 풍경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움의 정체라고 저자는 말하는 듯하다.

지은이 소개

이지누는 한국 문화를 섬세한 눈으로 톺아보며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하며 불교문화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 발간된 《나말여초의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 추만호)에 사진작업을 했다. 그리고 퇴옹 성철 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지금껏 큰스님들의 다비식을 기록해오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룬 계간지인 《디새집》(열림원)의 편집인으로써 창간을 주도했다. 그 후 《불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나라 안 폐사지에 대한 기록은 물론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산재한 마애불의 기록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불교문화 외에 민통선 지역이나 비무장지대 그리고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조사와 사진기록을 하고 있으며, 이 땅의 순정한 민초들에 대한 작업도 이어 오고 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폐사지 답사기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알마)를 비롯해,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샘터),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잃어버린 풍경 1.2》(호미), 《이지누의 집 이야기》(삼인), 《관독일기》(호미) 들이 있다.

알마 / 356쪽 / 2만 2000원

  
 
中國 日本 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