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   지난호 보기  |   웰빙음식  |   좋은 글  |   음반/서적  |   울림이 있는 이야기  |   배경화면
만불사 홈 > 붓다의 메아리 음반/서적
   설봉 도인, 선종 최후 공안집 ‘무문관’ 빗장 풀다 [불교도서] 2012-12-18 / 3784  

 

‘선가한화(禪家閑話)’란 무엇인가?

내(설봉 선사)가 소백산 비로사에 있을 때, 선정(禪定)에 전념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 나누지도 않고, 또 경전이나 어록도 보지 않으며, 다만 말없이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마침 하루는 함께 머물고 있던 벗 최기정 선생이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한 번 읽어보라 권하였다. 나는 감사히 받아 책을 펴서 한번 읽어 보았는데 나도 몰래 환희용약(歡喜踊躍) 하였으니, 실로 참선하는 사람에게 크게 유익한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칠백오륙십 년 전인 남송(南宋)시대에 무문 혜개(無門 慧開) 화상이 지은 《무문관(無門關)》 48칙이었으니, 어찌 어설피 보아 넘기고 함부로 던져 둘 것인가? 본칙과 무문 화상의 각칙에 대한 평(評)과 송(頌)은 한 구절 한 구절 하나하나 자세히 뜻을 음미해 보면 무문 조사를 몸소 한번 보는 것과 매일반이니, 이 또한 숙세의 인연이 있는 바이다.

나는 제방(諸方)의 점검과 꾸짖음을 마다하지 않고 무문 화상의 평송(評頌) 말미에 나 자신의 소견을 평송으로 덧붙였으니, 훗날 벗들과 탁마하여 서로 성장하는 도구로 삼기 위해서이다. 만약 긍정치 못하는 사람은 청컨대 일전어(一轉語)를 내려 주기 바란다.

- 설봉 선사의 ‘선가한화 연기(禪家閑話 緣起)’ 중에서

《무문관》은 송(宋)의 무문 혜개(無門 慧開, 1183~1260) 선사가 1228년에 출간한 공안(화두, 선문답)집이다. 선사가 직접 고른 48칙의 공안에 일종의 힌트와 같은 간략한 평(評)과 송(頌)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선종 최후의 공안집’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널리 유통되거나 알려지지 않았다. 근래 들어 여러 《무문관》 번역서들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 원문에 대한 번역과 각칙 공안에 대한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번역은 그렇다 치고 그 해설이란 것이 심하게 말하면 창작 소설 수준에서 철학 논문과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중구난방이다.

그러다 역주(譯註)자인 심성일 선생은 우연히 근세 우리나라의 큰스님 설봉  학몽(雪峰 鶴夢, 1890~1969) 선사의 법어집인 《설봉대전》에서 《무문관》에 다시 평송을 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무문관》 48칙 공안에 대해 설봉 스님 나름의 안목으로 평과 송을 붙인 것이다.

설봉 스님이 남기신 법어와 함께 평송을 살펴보니 역주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큼 선지(禪旨)가 분명한 것이기에 함께 엮어 책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역주자는 자질구레한 군더더기 해설 대신 촌철살인으로 직지인심(直指人心)할 수 있는 기연이 될 만한 설화들을 덧붙여 보았다.

역주자인 심성일 선생은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설봉 스님과 그 분의 선풍을 제 부족한 솜씨로나마 되살려 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알면서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며 “행여 제 불찰로 선사의 뜻이 잘못 전달되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랑이를 그리려 하면서도 겨우 고양이밖에 그리지 못하는 저의 미숙함 때문일 것”이라 출간 의도를 밝혔다.

지은이 소개
설봉 학몽(雪峰 鶴夢, 1890~1969) 스님은 1890년 11월 25일 함북 부령(富寧)에서 장영교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2년 한성중앙학교를 거쳐 공업전문학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고, 1910년 스무 살 되던 해에 조선총독부 문관(文官)으로 취직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항일운동에 관련되어 검거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파면된 후 한동안 투옥 또는 도피 생활을 하다 1915년 25세에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釋王寺)로 출가해 참선 공부에 전념한다.

1920년 만공(滿空) 스님 회상에 머물며 더욱 공부를 깊이 하고 만공 스님의 법을 이었다. 이어 1925년에는 도봉산 망월사 용성(龍城) 스님 문하에서 정진했다. 이후 20여 년간 오대산,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등에서 정진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선학원 등에 주석하면서 정화불사(淨化佛事)에 전력을 기울이다, 1955년 불교정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한 뒤 남쪽으로 주석처를 옮겨 후학들을 제접했다. 부산 범어사와 대각사, 선암사 등에서 머물던 스님은 1969년 4월 17일 선암사에서 세수 80, 법랍 55세로 원적에 들었다.

전법제자로 금산지원(金山智源 ; 1931~2008) 스님이 있으며, 《선문촬요》, 《선관책진》, 《선문염송》 등의 원전을 현토 주석한 저술을 남겼다. 1971년 금산 스님이 부산 온천동에 대덕사(大德寺)를 창건하고 설봉 스님의 법어를 모아 《설봉대전》과 《설봉학몽 대선사 선문염송 법문집》을 편찬하고, 설봉 스님이 현토한 《우리말 선문촬요》를 간행하였다. 현재 대덕사에는 금산 스님의 상좌인 춘식(春植) 스님이 주지를 맡아 출재가 선객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역주자 소개
심성일(盲龜 居士). 1969년 생. 훈산(薰山) 박홍영 거사와 부산 무심선원(無心禪院) 김태완 원장의 지도 아래 7년 간 조사선 공부. 현재 대덕사에 주석하는 춘식 스님으로부터 원명(圓明)이란 거사 호를 받고 매주 입실(入室)하여 공부 지도를 받고 있다.

비움과소통 / 288쪽 / 변형신국판 / 1만 4000원

출처 : 출판사 책소개

  
 
中國 日本 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