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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당장 그대 면목은 어떤 것인가! [산방한담] 2008-12-29 / 2998  

 
지금 당장 그대 면목은 어떤 것인가!

法 頂(스님)

* 이 글은 지난 2005년 11월 15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설하여진 법정스님의
동안거 결제법문을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산에서 사는 수행자들은 이 달, 11월을 어느 때보다 가장 마음에 들어 합니다. 잎이 다 져서 빈 가지만 남아 있는 나무, 쌀쌀한 바람결, 맑게 갠 하늘 그리고 여름동안 가려져있던 산과 계곡이 그 모습을 다 드러내는 시절이기 때문일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11월을 가장 좋아합니다.
며칠 전, 서울 종로 네거리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리 한 쪽이 없는, 남은 다리도 주체를 못하겠던지 질질 끌면서 남루한 옷차림의 걸인이 아주 힘겹게 와 서더니 힘이 들었던지 그냥 주저앉고 말더랍니다.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흘깃흘깃 그 걸인을 곁눈질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 있던 두 청년이 서로 마주보고 잠시 얘기를 하더니 신호가 바뀌자 얼른 그 걸인에게 달려오더랍니다. 그리곤 한 사람은 뒤쪽에서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앞에서 힘없이 흔들거리는 그의 다리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서 길을 건너게 해주었습니다. 보도블록 한 쪽에 그를 내려놓은 젊은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뛰어서 길을 건너가더랍니다.
얼마 전 아는 친구에게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선뜻 나서서 돕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마운 일입니다. 이렇게, 아무 분별없이 선뜻 나서서 이웃을 돕는 것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불교수행의 첫걸음은 보리심을 발하는 겁니다.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는 불도(佛道)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보리심을 발한다는 뜻의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줄여서 ‘발심(發心)’이라고 합니다. 이 때의 ‘발(發)’이란 <본래 지니고 있는 그의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어 펼치라>는 뜻입니다.
옛 선사의 법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움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림이다
자기를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은 비로소 자기가 된다.”
어려운 이웃의 처지를 보고 선뜻 나서서 돕는 데에는 자기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심코 그런 행동을 하는 겁니다.
얼마 전 지하철 선로에 어린아이가 떨어지자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한 고등학생이 선뜻 나서서 구했던 일도 있지 않습니까. 이 경우도 자기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아의 상태에서 행동한 것입니다. 아이 엄마마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지 못할 정도로 극히 위험한 상황에 자기라는 분별이 있었다면 누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하겠습니까.
개체인 내가 전체인 나로 확산되는 소식입니다. 우리 각자 개인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라는 생각, 여러 가지 불필요한 생각들로 인해 그런 마음들을 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동안거 결제날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름, 겨울 안거를 거치면서 우리는 새롭게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두만 챙기고 기도만 잘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내가 지니고 있는 본래 내 마음을 선뜻 펼쳐 보일 수 있어야 됩니다. 발보리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님들은 대개 출가 후 강당에서 4년간 경을 공부한 후에 선방에 들어가 참선을 합니다. 한 스님이 첫 안거를 나는데 도무지 화두가 들리지 않더랍니다. 애를 써 보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졸음과 망상만 이어질 뿐 도무지 진전이 없었습니다. 처음 선방에 가면 공부는 차치하고 다리 아프고, 졸리고, 망상만이 가득한 경험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자신의 업장이 두터워 참선에는 인연이 없나보다 싶어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돌이켰답니다. 선방에서 함께 정진하는 10여 명의 스님들을 위한 기도를 해주기로 한 겁니다. 참선 시간에 한 스님, 한 스님 떠올리면서 ‘아무개 스님, 이번 철 아무 장애 없이 공부를 크게 성취하게 해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름 쯤 하고 나니까 하루는 문득 아주 기쁜 마음이 일면서 졸음과 망상이 사라지고 정신도 맑아지면서 그 때 비로소 화두가 제대로 들어지더랍니다.
남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비로소 내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선행이란 그런 겁니다. 선행으로 한 개인으로부터 전체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보리심을 발하지 않기 때문에 묵혀있는 겁니다.
송나라 때 스님으로 장모종색 선사라는 분이 좌선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한 글 첫머리 구절을 소개합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큰 자비심을 일으키라
넓은 서원을 세우고 정미롭게 삼매를 닦아야 한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고
내 한 몸만을 위해 해탈을 구해서는 안 된다

화두란 옛 선사들의 문답을 바탕으로 해서 공부의 과제로 삼는 것입니다. ‘1700공안’이라는 표현도 <전등록(傳燈錄)>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수가 1700명인데, 그들 모두가 이야기 한 것은 아니지만, 화두가 그렇게 많다는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화두가 반드시 옛 스승들의 말에만 있는 것입니까. 참선을 하시는 분들은 제 말을 분명히 들으십시오. 우리가 들고 있는 공부의 명제, 화두에 대해 한 번 반성해보십시오. 진짜 내가 바른 화두를 하고 있는지 건성으로 하고 있는지 괜히 폼만 재고 있는 지 스스로 되돌아보면 압니다.
살아있는 화두를 해야지 죽은 화두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진전이 없습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화두는 살아있는 화두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때 그 상황에서는 살아있는 화두의 역할을 했지만 이미 지금에 와서 관념화된 화두는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살아있는 화두는 그럼 어디에 있는가? 진짜 살아있는 화두는 종로 네거리에, 시장통에, 동네 길목에, 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늘 있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겁니다. 다른 곳에서 화두를 챙기기 때문에 삶의 절실한 명제인 그 화두를 놓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깨어있는 사람은 바로 그 때, 그 곳에서 삶의 교훈이자 과제인 그런 화두와 마주치게 됩니다. 이게 살아있는 화두입니다.
풋중 시절, 벌써 50년 가까운 옛이야기인데 해인사 선방에서 지낼 때입니다. 수덕사 금봉(錦峯)스님을 조실스님으로 모셨고, 주지는 청담스님이셨습니다.
그 때는 선방 옆이 조실스님 방이었는데 한 달에 두 번, 즉 보름에 한 번씩 조실스님께 가서 공부한 것을 묻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실스님 방에 들어가기에 저도 같이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 스님은 조실스님께 화두가 잘 안되는데 어떻게 하면 화두를 잘 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때 조실스님께서 무슨 화두를 들고 있는가 물어보십니다. ‘본래면목’,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에 본래의 자기 자신은 누구였는가 하는 화두를 들고 있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조실스님께서 ‘본래면목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 그대의 면목은 어떤 것인가’ 하고 반문을 합니다. 질문한 당사자 스님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곁에서 듣던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도 참선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불교는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법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당장, 그 자리입니다. 오늘 바로 이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선하고 기도하고, 염불하고 주력하는 것은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는 겁니다. 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숨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굳어지는 것이 이 육신인데 다음 순간의 일을 어떡하라는 겁니까. 적어도 공부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어제도 없습니다. 늘 지금입니다. 늘 바로 이 자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래면목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의 그대 면목은 어떤 것인가!’
바른 스승의 가르침은 그렇습니다. 이번 겨울 안거동안 죽은 화두를 챙기지 마십시오. 죽은 화두를 가지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는 화두를 가지고 정진해야 합니다. 보리심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화두를 통해서 정진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정진하는 분들, 특히 참선하는 분들, 염불하는 분들, 기도하는 분들도 낱낱이 살펴보십시오. 지금 내가 간절하게 하는 일이 보리심을 발하는 일인가, 아닌가. 나의 정진이 나와 내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바른 정진이지만, 저 혼자 좋아서 하고 거기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정진이 아닙니다.
불교도들이 공통으로 세우는 서원이 네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입니다. 입으로만 따라하면 아무 의미 없지만 이것은 아주 큰 서원입니다. 보리심을 발하는 사람만이 올릴 수 있는 서원입니다. ‘끝없는 중생을 기어이 다 건지리다’, 어려운 이웃들을 제가 다 뒷바라지하고 보살피겠다는 서원입니다. 이것이 발보리심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안거기간에 어떤 정진을 하던 간에 결과적으로 보리심을 발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올바로 수행한 것이지만 보리심과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시간만 보낸다면 그것은 잘 못된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해서 저 자신부터 보리심을 발할 수 있는, 이웃에게 회향할 수 있는 마음을 내기를 바라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출처 : 맑고향기롭게>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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