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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불사 홈 > 붓다의 메아리 음반/서적
   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불교도서] 2009-03-11 / 4462  

 
춘성(1891~1977)은 근대불교, 현대불교의 격랑의 중심지에서 승려로, 수행자로, 망월사 주지로 그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자유인이었다. 그리고 한용운의 상좌로, 백용성과 함께 『화엄경』사상을 웅변적으로 전하였던 화엄법사로, 덕숭산 끝자락에서 장좌불와하였던 고집스런 수행자로, 시대의 선승 만공 회상에서 지독스럽게 참선 수행을 하였던 간화선 수행자로,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좌들을 매섭게 지도하였던 어른으로, 서울 시내의 저자거리에서 부처님 말씀을 원색의 언어로 전하였던 스님으로, 수많은 보살들을 부처님 세상으로 이끌었던 큰스님이었다.

춘성 스님의 걸망에는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 그리고 빤스 하나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난 무소유의 실천자 였다.

또한 서대문 감옥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케 한 장본인으로써, 「조선독립의 서」가 『독립신문』에 게제 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본문 중에서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기념연설을 하고 만세 삼창을 선도하였다. 그래서 그 길로 한용운은 일제에 피체되어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

이렇게 한용운이 옥에 수감되자 춘성은 한용운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나왔다. 그는 거처를 서울의 외곽에 있는 절인 망월사로 정하고, 서대문 감옥을 드나들면서 한용운을 정성껏 시봉하였다. 춘성은 그때 망월사에 머무르면서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고 자지도 않고 냉골 방에서 참선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때 망월사를 들렀던 어떤 스님이 땔감이 절에 가득한 데에도 불구하고 불을 때지 않은 냉방에서 자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춘성에게 그를 물었다.

“아니, 저렇게 땔나무가 많이 있는데 어째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고, 냉방에서 잠을 자는 게요?”
“그야 그렇지만, 제 스승이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 한데 붙잡혀 지금 서대문 감옥의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그 제자인 제가 어찌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춘성은 이처럼 한용운이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는 줄곧 냉방에서 자며 수행을 하였다. - (40~41쪽)

우리는 민족운동사에 길이 남을 문장인 「조선독립의 서」를 옥 밖으로 나오게 한 장본인이 춘성임을 알게 해 준다. 옥중에 수감되어 매서운 지조를 지키던 한용운은 조선독립에 대한 명분, 당위성을 일체의 책을 참고하지 않고, 1919년 7월 10일에 집필하여 일제의 재판관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면서 한용운은 그 글을 휴지에 써서 똘똘 말고, 종이끈으로 만들어 옥 밖으로 내보내는 자신의 옷의 갈피에 숨겨 춘성에게 전달하였다. 그러자 춘성은 항일 불교청년운동을 철저히 수행하면서 한용운을 열렬히 따르던 범어사 청년 승려인 김상호에게 그 문건을 전달하였다. 김상호는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불교계의 비밀루트를 이용하여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1919. 11. 4)에 그 전문이 게재되었다. - (42~45쪽)

춘성에 대한 별칭이 화엄법사이었으며,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다는 저간의 구전이 나온 것은 위와 같은 백용성과 함께 한 강의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춘성은 백용성의 대각교당의 『화엄경』 법사로 나서면서 백용성이 주관하는 어린이법회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이를 전하는 『불교』지 48호(1928.6)의 「대각일요학교 설립」의 내용을 보자.

경성부 봉익동 2번지 대각교회(大覺敎會) 내에는 거(去) 4월 15일부터 대각일요학교(大覺日曜學校)를 설립하고 현재 남녀 학생 80여인을 교수(敎授)하는데, 고문은 백용성, 이인표, 이만승, 고봉운, 최창운 교장은 이근우, 교사는 이춘성, 안수길 제씨(諸氏)이며, 5월 6일에 제1회 학예회까지 개최하여 하모니카(독주), 자수노래(독창), 동화(오색사심이), 유희(밝은 달 독창), 딴스, 뻬니쓰, 요술, 연극 등을 관중의 갈채리에 흥행하였다더라. - (65~66쪽)

춘성은 바랑을 메고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온 산하가 그의 집이고 수행처였다. 그 무렵 춘성은 망월사에를 들러 수행하였다. 춘성과 망월사와의 인연은 깊디깊은 바닷물 같은 것이었다. 춘성은 망월사에서 지독한 수행을 거듭하였다. 망월사 뒤에 있는 바위에서 그는 추운 겨울날에 삼매에 들 정도로 참선에 몰입하였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손과 발이 동상이 걸렸다. 그로 인해서 춘성의 말년에는 손톱과 발톱이 썩기도 했다. 춘성이 17일간을 단식을 하면서 죽기 일보 직전에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정황도 춘성의 그 시절 수행력을 짐작 할만하다. - (82쪽)

춘성은 그의 출가 은사인 한용운에게 자주적인 독립의식을 배웠다면, 만공에게는 선의 정법을 전수받았다. 그래서 춘성은 만공의 입적 후에는 만공의 수법(受法) 제자로도 공인되었다. 1982년 만공문도회에서 펴낸 『만공 법어』의 말미에는 만공의 수법제자의 법명이 나온다. 그 37명의 명단에 춘성의 이름이 당당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만 춘성은 은상좌(恩上座)가 아니고, 참회제자라는 표현을 하였다. 은상좌, 참회제자를 구분한 주체는 만공문도회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경허, 만공으로 이어진 참다운 선법을 누가 올곧게 계승, 실천하였느냐이다. - (89쪽)

춘성이 망월사 불사를 할 때에 나무를 베었다고 해서 경찰서에 가서 나눈 대화였다.

“본적이 어디입니까?”
“내 본적은 우리 아버지 신두(腎頭)이지.”

경찰은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궁하듯이 재차 물었다.

“본적을 말해요, 본적이 어디냐고요?”
“그것은 당신이나 나도 가지고 있으며, 살았다 죽었다 하는 자지야.”
자지라고요?

경찰은 기가 차듯이 웃고 말았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남성의 상징을 자신의 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웃을 도리 밖에 없었다. 경찰은 애써 긴장하면서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 고향은 어디입니까?”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보지 속이지.” - (112쪽)

그 무렵의 각처에 있는 수좌들은 춘성의 회상에서 한 철이라도 나려고 발길을 재촉하였다. 망월사 선방에서는 이불을 덮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춘성도 대중들과 함께 큰방에서 함께 자고 수행을 하였다. 망월사 수좌들은 방석 서너 개만 있으면 잠자리는 해결되었다.
그래도 춘성 몰래 담요를 갖고 와서는 덮고 자는 몸이 불편한 수좌가 있었다. 그러면 춘성은 즉각 “야! 시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내놓지 못해”하고서는 담요를 빼앗아 바로 불태워 버렸다. 어떤 신도는 망월사에 이불이 없는 것을 보고 이불 수십 채를 가져 와 보시하였다. 그러자 춘성이 신도가 기증한 이불 전체를 마당에 모아 놓고 바로 불을 질러 버렸다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비사이다. 겨울철에는 수좌들이나 신도들이 간혹 털 잠바를 입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 털옷을 안방에 걸어 놓고 법당에 갔다 오면 불에 타버리기 일쑤였다. 옷의 임자인 수좌가 항의를 하면, 춘성은 “보기 싫어서 내가 태워 버렸다”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수행하는 수좌가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편한 잠자리, 따듯한 옷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느냐는 추상같은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 (117~118쪽)

어느 날 춘성은 통금 시간이 넘어서 밤길을 가고 있었다. 방범 순찰을 하던 순경이 춘성에게 물었다.

“누구요?”

춘성이 어둠 속에서 즉각 답을 하였다.

“중대장이다!”

그 소리를 들은 순경은 목소리는 노인 목소리인데, 중대장이라고 하니 의아해서 들고 있던 후래쉬로 춘성을 비추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의 대장이지! 맞지?” - (397쪽)


| 서평 |

만해 한용운의 제자
진정한 선승, 호탕한 법문으로 세상을 흔든 큰스님

춘성은 위와 같은 도인, 선지식, 큰스님이었지만, 그간 그의 유언,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는 분부로 인해 춘성에 대한 정리, 소묘 등은 지금껏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미답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춘성문도회는 춘성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어, 그의 입적 4주기가 되던 해인 1981년에 그가 마지막으로 주석하였던 봉국사(성남)에 부도와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 최근 봉국사 주지로 효림 스님이 취임하면서, 춘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문도회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문도회에서는 춘성 스님을 다시 찾는 작업의 작가로 김광식을 지명하였다.
춘성 스님을 복원시키는 작업을 의뢰받은 김광식(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부천대 겸임교수)은 한용운 평전, 백용성 평전을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 ‧ 현대 불교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 작업을 한 이 분야의 최고 학자이다.
김광식은 지난 2년간 춘성에 대한 문헌자료 검토, 분석을 수행하면서 춘성과 인연이 있는 스님, 재가자 등을 찾아 춘성에 대한 증언을 채록하였다. 그리고 춘성에 대한 수많은 일화도 함께 채록하였다. 김광식은 이 같은 치열한 작업의 바탕에서 "1부 ; 춘성 일대기, 2부 ; 내가 만난 춘성, 3부 ;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된 대작불사를 완수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된 이 책은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아무도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찾을 수도 없었고, 그렇지만 반드시 복원시켜야 하는 큰스님인 춘성에 대한 전모를 오롯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춘성 찾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는 춘성 당신이 자신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아 춘성의 실제 행적이 불균형한 것, 춘성 찾기가 늦음으로써 그에 대한 증언이 그의 후대에 머무른 것, 춘성의 수행과정에 대한 자료가 소략한 것 등을 말한다. 이런 문제는 후학, 문도회 등이 지속적으로 고민할 과제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춘성에 대한 종합적인 탐구는 이제부터 본격화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간 소문, 전설, 신비, 과장 등으로만 점철된 춘성의 생애를 문헌, 증언, 일화로 통해 복원시켰다는 의미에서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춘성의 진면목에 다가설 수 있는 토대를 굳건하게 마련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운수납자의 진정성, 불교 지성, 참선 수행, 수행자의 진면목, 불교 독립운동의 정수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추천의 글 |

춘성 스님은 저희들에게 뚜렷하게 교육을 하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스님의 하나하나의 모든 행동 자체가 그냥 가르침이었을 뿐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말로 하시는 것보다는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혜성 스님 | 봉국사 회주

그 어른이 살았던 행적은 결코 지워버릴 수 없어. 꺼지지 않는 불길이지. 춘성 스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거기에 뜻이 있어요. 내 평생 그런 인상을 받은 분이 없어요. 저는 금오 스님도 모셔 보았고, 그 밖에도 전강, 동산, 설봉, 향곡 스님도 모셔 보았지만, 그런 인상은 받지 못했어요.- 우송 스님 | 덕숭총림 수덕사 유나

큰스님들은 대부분 독방 쓰면서 잘 살고, 신도들 대접을 잘 받았지만, 춘성 스님처럼 큰방에서 살았고, 방석 두 개로 잠을 자고, 옷 두 벌도 없었고, 신도들의 대접에는 신경도 안 쓰고, 돈이 생기면 남을 다 줘버린 경우는 그 당시에 없었다고 한다. -수명 스님 | 용인 서광사 주지

망월사 춘성 스님 밑에서 제가 살았는데, 50년 동안 동산 스님으로부터 지금까지 봐 오면서 중 한사람을 꼽으라면 춘성 스님을 꼽겠어요. 아주 감동적이고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위대한 중이 있었어요. 봉국사에 가서 영정에라도 참배하세요. 그런 분입니다.-무비 스님 | 전 조계종 교육원장,『서장』 강의 중에서

베개를 갖고 잠을 자면, 베개를 집어 던지고 난리가 납니다. 춘성 스님은 “이놈들아 목침 하나 갖고 자다가, 거기서 굴러 떨어지면 바로 일어나서 정진을 해야지, 잠을 자려고 작정하고 달려든 놈들아, 이 도둑놈아, 밥 도둑놈아!”라고 하셨어요. - 수경 스님 | 화계사 주지

제가 볼 때에 춘성 스님은 정진하는 수좌를 끔찍하게 아꼈습니다. 그리고 욕심도 없었고요. 다른 스님처럼 폼 잡고, 공부한 것도 없는데, 공부한 것이 있는 양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탈한 분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싸 갖고 있었던 분이 아닙니다.- 명진 스님 | 봉은사 주지

공부를 철저히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돈에 욕심이 없는, 아무것도 소유치 않는 것은 지금 스님들이 배워야 합니다. 이제는 춘성 스님과 같은 그런 스님이 나올 수가 없어. 어쨌거나 돌아가신 큰스님들과 같은 그런 스님이 없어.- 진관 스님 | 진관사 회주

만해 용운께서는 // 산중 괴각(乖角)이시라 / 상좌도 딱 하나밖에 두지 않았다 / ……// 춘성 선사 // 만해 용운이 감옥에 갇혀 계실 때 / 만해의 독립이유서를 / 몰래 받아내어 /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에 / 보내었다 // …… - 고은 | 시인,『만인보』 25권(창비) 「춘성」중에서

춘성 스님이란 분은 신체도 걸출하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선의 공부 어디에 걸림이 없었어. 만약에 춘성 스님이 신라시대의 사람이라면 원효야. - 목정배 | 동국대 명예교수

엄홍길을 키워준 산은 바로 도봉산이다. 도봉산은 엄홍길에게는 또 하나의 어머니, 친구, 스승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도봉산을 제집 드나들 듯 오르내렸기에 그럴 만도 하다. -이맹임 여사 | 산악인 엄홍길 모친

| 지은이 | 김광식

법명은 만암卍庵, 호는 지허止虛. 건국대 사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문학박사), 한국 근·현대 불교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현재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부천대 겸임교수,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근대 불교사연구』, 『한국 현대 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용성』, 『한용운 평전』, 『아! 청담』, 『그리운 스승 한암 스님』, 『범어사와 불교정화운동』 등 15권의 저서가 있다.

<출처 : 불교닷컴 3월 11일자>
[위 기사는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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