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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수첩을 적으면서 [산방한담] 2009-01-13 / 2817  

 
法 頂(스님)


한 겨울 추위를 피해서 잠시 남쪽으로 내려와 지내고 있다. 15년 남짓 겨울철이면 얼음과 눈으로 싸인 혹한 속에서도 밍밍한 날씨보다 긴장감을 불러 일으켜 지낼 만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추위가 부담스럽고 더러는 겁이 날 때도 있다. 이 또한 노년이 겪는 현상일 것이다.

겨울철이면 장작난로 곁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곤 했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온화한 날씨 덕에 난로가 필요 없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북쪽의 눈 쌓인 산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마음 한 구석에 이런 그리움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나를 풋풋하게 하는 것 같다.

지금이 12월 하순인데 이곳에는 길가에 자생하는 수선(水仙)이 피고 있다. 화단이나 화분이 아닌 노변에서 피어난 수선화를 보니 너무도 반가웠다. 외국에서 들여온 수선은 그 꽃빛깔은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 토종 수선은 꽃도 수수하고 그 향기 또한 은은해서 기품이 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이런 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불일암에서는 3월 하순 쯤 돼야 겨우 꽃을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렇게 한겨울에 문을 연 수선이 기특하고 반가워 쉬이 발길을 뗄 수가 없다. 어제는 시장에 나가 물미역을 사다 먹었다. 겨울철 내 미각을 돋구는 찬거리 중 그 으뜸은 단연 물미역이다. 물미역은 뜨거운 물에 데치지 않고 초고추장에 찍어 날로 먹어야 물미역이 지닌 그 독특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한 묶음에 2천원. 물미역의 내 ‘용량’은 두 묶음 쯤 되어야 한다.

물미역은 이파리보다는 그 줄기가 오돌오돌 씹히는 맛이 있어 더욱 맛이 있다. 요즘은 양식 미역이지만 1월 중순 쯤이면 자연산이 나온다. 자연산의 맛이 단연 앞선다. 줄기와 잎이 양식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달다. 양식 미역은 그 빛깔이 갈색이지만 자연산은 거의 검은 색에 가깝고 윤기가 난다.

그저께 밤에는 큰 마음 먹고 주소록이 적힌 수첩을 정리했다. 벌써 10여 년 번에 수첩은 구해 놓고도 미적미적 미루는 나쁜 버릇 때문에 거의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수첩이었다. 말하자면 20세기의 유물을 21세기에 와서 폐기처분하고 새것으로 바꾼 셈이다.

새 수첩에 거래처(주로 출판사)의 지인들의 주소를 옮겨 적으면서 최소한도로 걸러냈다. 그러다 보니 이전 수첩에서 4분의 3쯤은 떨어져 나갔다. 내 삶을 보다 간단명료하게 가지치기한 것이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한 생애의 자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여 년을 지나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거나 멀리하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 온 삶의 과정이 개인의 인생사(人生史)를 이루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그 주소록에 실린 고마운 이웃들의 은혜와 보살핌과 관심이 그때그때 나를 받쳐주었음에 뒤늦게 고마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의 존재 의미는 그 자신 뿐 아니라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영향과 자신이 하는 일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새 수첩에 새로운 이름과 주소를 보태기보다는 전에 적힌 것들을 지우면서 누군가의 수첩에서 내 이름과 주소도 함께 지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덧없는 인간사이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출처 : 맑고 향기롭게>
[위 글은 영천 만불사에서 스크랩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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