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올해 70세 되신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3년 전 쯤에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 한동안 홀로 아파트에서 사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내외가 혼자 계시는 모습이 보기 안됐다고 아파트를 팔고 집으로 들어오시면 잘 모시겠다고 계속 사정을 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당신 아파트를 정리하고 아들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물론 지참금(?) 같은 것을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뭔가를 찾느라고 아들 며느리 방에까지 들어가게 됐습니다.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가계부가 눈에 띄어 무심히 훑어봤답니다. 그랬더니 지출항목 중에 ‘촌놈 용돈 2만원’이란 기록이 보이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가만히 살펴보니 며느리가 시아버지한테 용돈 주는 것을 ‘촌놈 용돈 2만원’이라고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그날로 그 집을 나왔습니다.
놀라우십니까?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저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해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정으로 따뜻했던 가정이 해체되고 썰렁한 빈 가옥만 남은 집안이 한 두 집이 아닙니다.
가족끼리의 대화도 단절되고 있습니다. 모두 같이 어울려 식사도 하고 오늘 하루 이야기도 나눠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여건이 되질 않는다고 합니다. 일하는 시간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다 보니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대화가 단절된다는 것은 비극의 싹이 튼다는 겁니다. 그저 묻고 답하는 게 대화가 아닙니다.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있어서 그걸 주제로 서로 속의 말까지 털어 놓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대화입니다. 대화가 끊어지게 되면 가정은 삭막해집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습니다만 전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지나칠 만큼 매사에 임기응변적이고 자기본위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가족 간의, 이웃 간의 단절현상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가족들은 서로 닮아갑니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의 사람들은 저마다 따로 놉니다. 우스갯소리로 콩가루 집안이라 하지 않습니까. 자기 가정에 들어와서 평온한 분위기를 누릴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건전한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건전한 가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사회 구성요소 중 하나인 가정이 해체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텔레비젼 연속극의 아무개 집 처지는 잘 알면서도 막상 가까이 지내는 내 친구의 집안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면 사생활이 보호받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영역은 점점 왜소해집니다. 인간의 설 자리가 점점 비좁아집니다. 가까운 이웃이 찾지 않고, 친구들이 찾아갈 수 없는 집은 진정한 집이 아닙니다.
옛날하고 달라서 요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집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집 밖의 병원에 가서 태어납니다. 돌잔치, 생일잔치, 환갑잔치, 칠순, 팔순, 구순잔치 모두 밖에서 합니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자기 집에서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집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집은 뭐하는 곳입니까? 내 집 마련을 위해서 몇 십 년 동안 애를 쓰다가 집이 생기면 얼마나들 좋아합니까. 하지만 결국에는 따뜻한 가정은 잃어버리고 차디찬 가옥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며칠 전에 누가 불쑥 저한테 물었습니다.
“스님, 중노릇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뭡니까?”
대답은 ‘인간관계’였습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일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관계가 원만하면 우리 마음이 편하고 느긋해집니다. 그러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는 그가 가족이 됐건 직장동료가 됐건 혹은 친구가 됐건 내가 그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의 삶은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둡고 추하고 모자라고 온갖 고통으로 둘러싸일 수 있습니다. 굳이 신문, 방송을 보고 듣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을 보면 늘 사건사고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될 것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사물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가짐이 바로 사물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2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까맣게 잊어버렸었는데 얼마 전 당사자를 만나 들은 이야기입니다. 당시 그 분은 40대 초반의 주부였는데 너무도 이기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다가 이혼을 결심하고 저에게 상담을 했답니다.
선풍기를 틀어도 자기 쪽으로만 돌리고, 텔레비젼 프로도 자기위주로만 보고 꺼 버리는 가 하면 대학출신이지만 책은 전혀 읽지 않고, 몸에 좋다는 것은 어떻게든 구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혼자서 야금야금 먹어대는 남편이 문제였습니다. 이런 사람과 아이를 셋이나 낳고 기르면서 힘들게 살았음은 물론이고 그간 자신의 삶은 전혀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던 겁니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그분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식사준비를 할 때 이 얄미운 녀석한테 밥 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마음가짐으로 해 보십시오. 차를 만들 때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해 보십시오. 아이들 아버지가 저녁때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부처님이 돌아오신다고 반겨 보십시오. 밖에 나갈 때 뒷모습을 보고도 부처님 뒷모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혼 결심까지 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으니 어이가 없었을 겁니다. 사실 그 분 말이 처음에는 이런 저의 조언이 잘 와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공부 삼아서 하루하루 노력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점점 변화가 생기더라는 겁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도 사라지고 이제는 아예 없어졌다고 말입니다.
만일 누군가와 지금 다시 같은 내용의 상담을 하게 된다면 전 똑같은 말씀을 드리게 될 겁니다. 종교가 다른 분들이라면 부처님 대신 주님이라든가 천주님이라든가 알라신으로 느끼면 편하실 겁니다. 꼭 불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 대상이 누구건 특히나 먹을 음식을 준비할 때는 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생각으로 하십시오.
내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드는 겁니다. 관계란 이런 겁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겁니다. 맞서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부부지간에도, 친구지간에도,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혹은 동료 간에도, 애인사이에도 맞서면 서로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생각을 돌려 마음을 편한 쪽으로 돌이키면 온전히 본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자아실현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주부가 마음공부를 착실히 한 결과 위태롭던 가정이 다시 회복되고 자식들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번듯하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가정의 위기를 극복한 겁니다.
요즘 걸핏하면 이혼하기를 식은 죽 떠먹듯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혼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 되는 건 아닙니다. 매듭이 풀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그런 여자, 이런 남자를 만나서 고생을 하느냐고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선을 잘못 봐서, 순간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업을 고쳐야 비로소 매듭이 풀립니다. 해결책은 내가 먼저 자기 자신을 투철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왜 그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사는 겁니까. ‘업’으로 얽힌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업을 고치지 않고는 매듭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인간의 덕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고 견딜 줄을 모릅니다. 자녀를 하나 둘 밖에 안 낳게 되면서 부모들이 아이들 뜻을 즉석에서, 다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니 참고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 한 가정을 거느릴 수 있겠습니까.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해 이탈하는 겁니다.
부처나 보살을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절에 부처와 보살은 없습니다. 밖에서도 찾지 마십시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부처와 보살을 일깨워야 됩니다. 이렇게 화창하고 눈부신 봄날 꽃구경가지 않고 뭐 하러 절에 왔습니까? 뭔가 일상생활에서 성이 차지 않으니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까.
《화엄경》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결코 차별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지만 이 세상은 결코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표현만 다르지 하나라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와 보살을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부처와 보살을 밖에서 만나려 말고 때로는 자기 집안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시들했던 관계도 새로운 활기로 채워집니다. 물질의 가옥이 정이 넘치는 가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삶이 기쁨과 고마움으로 채워질 때 향기가 배어나게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덕의 향기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순간 순간 사는 삶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합니까? 이는 철학자만이 탐구할 명제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이 몸뚱이는 유기체입니다. 껍데기입니다. 더러 오랜만에 아는 분을 만나면 다들 저에게 ‘아이고, 스님 너무 야위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적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줏돈으로 얻어먹는 사람이 디룩디룩 돼지처럼 살이나 쪄서야 되겠습니까.
내 몸은 유기체인 동시에 껍데기이지 알맹이가 아닙니다. 콩깍지와 콩이 다르듯 말입니다. 몸은 콩깍지처럼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콩은 세월의 풍상에도 아랑곳없이 늘 새로운 싹을 틔워낼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콩깍지를 벗어난다고 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우주의 에너지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참나’입니까? 우리는 몸에 너무 집착합니다. 몸이 곧 자신의 실체인 것처럼 늘 착각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고 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뭐든 구하려 하고 기를 쓰고 먹습니다.
하지만 마음공부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참선하고 참회하는 일은 결코 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절에 이렇게 오신 것은 몸이 온 것이 아닙니다. 일도 많은데 무엇이 끌어서 내 몸을 여기까지 데려왔습니까. 여기 안 올 수도 있는데 한 생각이 일어나서 이 자리에 온 겁니다. 몸은 그저 따라온 것뿐입니다.
마음공부란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면서 정진입니다. 이와 같은 정진을 거치면서 사람은 인간답게 성숙해 갑니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향상 되어 못한, 제 자리 걸음 상태인 것입니다.
각자 한 번 물어보십시오. 내 자신, 자아실현을 위해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내 인생이 소모되고 있는데 과연 내 자아실현을 위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삶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될 것인지 거듭 물어야 됩니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습니다. 과일에 씨앗이 박혀있듯이 해답은 물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고 그 해답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저마다 꽃피우면서 사는 따뜻한 가정의 가계부에는 ‘촌놈 용돈 2만원’이 아니라 ‘부처님께 용돈 20만원’이라고 기록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