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하여 도(道)를 깨친다는 것은 자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성을 깨닫지 못하면 도인(道人)이라 할 수 없고 도인이 되지 못하면 부처님의 진리를 확실히 알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도를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이 행하는 생각, 말, 행동은 부처님처럼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심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심이란 때 묻은 마음으로, 마치 거울에 때가 묻어 있으면 대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실현하도록 하였습니다. 내 마음에 ‘나’라는 생각이 나면 남이라는 개념에 상대성을 갖게 됩니다.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곧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갖게 되며 소유의식은 곧 탐욕심입니다. 이 탐욕심으로 인하여 모든 차별과 시비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살이가 어렵고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선하여 도를 깨치면 이 삼독심(三毒心)을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래 자성은 맑고 밝고 깨끗하여 삼독심이 없는 청정무구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내세울 것도 남이라고 분별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보여지고 판단되기 때문에 시비와 차별이 끊어져 어려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언제 어디선가 알게 모르게 때가 묻어 여러 가지 차별심을 갖게 된 것일 뿐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일체상의 분별을 버리고 무아법을 얻어야 참된 보살이라 하였고,《반야심경》에서 보살은 일체가 무소득, 곧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공(空)의 실현, 곧 반야바라밀을 성취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육조 혜능 선사는 “금강경이란 상(相)없는 것으로 종(宗)을 삼고 머무름 없음으로써 체(體)를 삼으며 묘유(妙有)로써 용(用)을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상이 없고 모든 집착이 없으면 활용이 자유자재하게 된는 의미입니다.
참선하여 마음에 대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깨달음으로 번뇌 없는 마음을 실현하여 어느 때 무엇을 만나더라도 밝은 지혜로 원만히 대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심은 때 묻은 마음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오류가 많고, 불심(佛心)은 청정한 자성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원만한 것입니다. 불심은 우리의 본래 자성이요, 중생심은 때 묻은 마음입니다.
참선하여 닦고 또 닦아 닦을 것이 없는 한 순간 일체의 번뇌 망상이 몰록 끊어지고 본래 자성이 확연히 들어 나면 이를 일러 ‘돈오자성(頓悟自性)’이라 합니다. 깨달음이란 불자의 최종목적이긴 하지만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고 조급증을 내거나 깨달음을 어떤 신통의 경계로 알고 써먹으려는 욕심을 가지면 깨달음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쉼없이 정진할 때 어느 땐가 깨침의 기연이 주어집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63호(2006년 8월 26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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