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완전한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직업도 가지고 결혼도 하며 여가 생활도 부지런히 하지 않나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린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부분 하늘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비단 어린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과연 하늘은 높은 곳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하늘은 바로 눈앞에서 전개됩니다. 우리들의 손 등에 닿아있는 것이 하늘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 멀리 하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처럼 우리들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부처님이나 신에게 소원을 바라면서 기도하는 것을 ‘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산이 불어나기를 빌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빌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언어학자는 이 ‘빈다’리는 말의 어원을 ‘비우다’라는 말에서 찾고 있습니다. 반야경에서 설하는 공(空)이라는 말이지요.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는 것이 소원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가득 찬 항아리에는 다시 물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행복이라는 항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질투로 가득 채워진 자리에 다시 행복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먼저 마음을 채우고 있는 탐욕과 분노, 질투와 아만 등을 모조리 비워야 합니다. 그것이 공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방안에는 온갖 가구를 생각대로 배치할 수 있듯이 마음이 텅 비었을 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 비는 기도입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 중에 아수라라는 중생이 있습니다. 이 아수라가 싸우는 상대는 천상계의 하나인 제석천의 군사들입니다. 그러나 아수라군과 제석천군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제석천군이 이기게 되고, 그 때마다 아수라들은 붙잡혀 포승줄에 묶이고 맙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제석천군이 묶은 그 아수라의 포승줄은 아수라가 싸우려는 마음을 거두기만 하면 풀리고, 그러다가도 다시 싸우려는 마음만 내면 더욱 옥죄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아수라의 포승줄이지요. 어쩌면 이 아수라의 포승줄은 우리네 인간들의 삶을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만약 분노로 상대방을 공격하고자 할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반대로 용서하고 화해할 때는 가슴이 후련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포승줄이 우리 몸을 묶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행복, 그 행복 된 삶을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비우는 공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우리들 가슴 속을 묶고 있는 탐욕과 분노와 질투라는 아수라의 포승줄을 푸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159호(2006년 7월 1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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