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부귀를 가지 사람은 공명을 가지려하고, 공명을 가진 사람은 수복을 가지려 하고, 수복을 가진 사람은 다시 강녕을 가지려합니다. 강녕을 가진 사람은 다시 처첩을 가지려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끝없는 욕심으로 한세상을 살려고 합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데 이렇게 욕심껏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산다면 이를 일러 행복하다고 할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떤 사람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살려고 하다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하거나 패가망신하는 일만 많아질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는 그런 길을 가지 말고 가난하더라도 당당하고 걸림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무욕하게 산 인생과 모든 것을 손안에 넣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산 인생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사실 평생 고생만 하며 사는 것이 평생 호강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할 근거를 대라면 그렇게 마땅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고생만 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남을 속이고 훔쳐서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행복한가, 죽음을 앞두고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 후회도 없고 원망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면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죽고 난 다음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 두렵습니다. 그것이 두려우니까 죽음 자체도 두려운 것입니다. 만약 죽음의 실체, 또는 죽음을 넘어선 세계에 대해 어떤 확신만 있다면, 그래서 그것에 대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훨씬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의 많은 수행자들은 사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했습니다. 부처님도 세속의 호화로운 생활을 접고 출가를 결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의 참선은 다른 공부가 아닙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공부입니다. 옛날 스님은 이렇게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용아 거둔(龍牙 居遁) 선사에게 한 수행자가 죽음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이에 용아 선사는 죽음이 없는 곳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인가.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선사의 대답은 당당합니다. ‘내가 곧 죽음이 없는 곳으로 간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나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 이 글은 만불신문 156호(2006년 5월 20일)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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