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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골골샅샅의 폐사지 여덟 곳을 가다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한국 문화를 글과 사진으로 섬세하게 기록하는 작가 이지누,
고요한 전라북도의 절터에서 스스로의 참모습과 마주치다

저자는 폐사지 답사기 1권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음양陰陽 모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결코 그중 어느 하나가 다른 어떤 것에 비해 우월하거나 우선하지 않는다.” 화려한 볼거리가 드물더라도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폐사지의 매력을 설명하기 위해 ‘음’의 미학을 끌어들인 것이다. 특히 이번 책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에서 다루고 있는 전라북도의 폐사지들은 저마다 상서로운 음의 기운을 특징적으로 머금고 있다.

묘하게도 전라북도의 폐사지를 돌아볼 때는 다른 여느 지방의 순례와는 또다른 기분에 휩싸인다. 더욱 쓸쓸하기도 하고 깊은 고독에 휩싸여 말을 잃기도 한다. 그것은 전라북도의 폐사지가 뿜어내는 치명적인 매력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자신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전라북도 폐사지의 분위기가 그러한 것은 폐사지에 떠돌고 있는 사연들 때문일 것이다. - 5쪽

이 책은 이러한 독특한 뉘앙스를 뿜어내는 전라북도의 절터 여덟 곳을 답사한 기록이다. 모두 여덟 권으로 기획된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의 두 번째 권으로, 앞으로 이 시리즈는 충청, 경기, 경주, 강원, 경남, 경북 편으로 차례차례 이어질 것이다. 전라북도의 폐사지 답사는 남원 만복사터에서 시작해, 남원 개령암터와 호성암터, 완주 경복사터와 보광사터, 고창 동불암터, 그리고 부안 불사의방터와 원효굴터로 이어진다. 저자는 때로는 시적인 감상으로, 때로는 설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때로는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료로 절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또한 현장의 느낌을 실감나게 전달함으로써 독서의 흥취를 더한다. 이를 통해 보통 관광객의 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전라북도 절터의 진면목을 순례자의 맑은 눈으로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고요가 흐르는 전라북도 절터의 치명적 매력

절터는 엄밀히 말하면 버려진 장소다. 예전에는 불사를 드리는 사람들로 흥성거렸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다. 그것은 외로움과 고독을 뜻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즈넉한 고요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절터는 인간 위주의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이 들려주는 진실의 소리에 새삼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이것이 부처님의 소리를 직접 듣는 것과 진배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듯 폐사가 되어 절의 흔적이 가뭇해지고 나면, 절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님 머문 자리에 풀과 나무가 자라고 물이 고이는가 하면, 눈이 쌓이고 구름이 머문다. 그렇다. 폐사지를 순례하려면 목탁과 염불 그리고 풍경과 범종 소리쯤은 앨범에 끼워 책장에 꽂아두거나 서랍 속에 넣어놓고 다닐 필요가 있다. 절터를 에워싼 채 머무는 자연의 소리는 부처님의 법어와 동격이기 때문이다. 이 순정한 새벽의 맑은 새소리 한줌이 어찌 청량한 부처님의 말씀보다 못하겠는가. - 225쪽

더구나 전라북도의 절터에서 마주치는 고요는 특별하다. 그것은 이 고요가 전라북도만의 독특한 미륵사상 아래에서 인지되기 때문이다. 전라북도의 미륵신앙은 지장보살 신앙과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미륵은 현세에서 구원받지 못한 중생들이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서의 구원을 바라며 복을 비는 부처를 가리키고, 지장신앙의 근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참회하는 것이다. 즉 전라북도의 미륵사상은 ‘참회를 통한 구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라북도 절터의 고요는 순례자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유독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에서 저자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 두드러지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어둠 속에서의 참회가 결코 자기비하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되짚어 내려오는 걸음, 가벼워야 할 텐데도 결코 그렇지 못했다. … 주변 누구에게 단 한 차례도 나는 빛이자 희망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을 참회하는 걸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을까. 산 아래에 세워둔 자동차까지 내려오는 내내 일부러 낙엽을 발로 차며 걸었던 까닭은 나 자신에 대한 소심한 화풀이였다. - 278쪽

불사의방에서 만난 진표율사의 망신참이라도 흉내 내려는 것인 양 남김없이 파헤쳐져 비루해진 나 자신이 어둠의 벽에 온몸을 부딪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마땅히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참회밖에 별다른 무엇이 없었다. … 더구나 무엇에 대한 참회인지 구체적인 것도 없었다. 나의 존재 전체에 대한 참회일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사실 깜깜한 원효방에서 무엇과 맞닥뜨릴지 아무 준비도 없이 깃들었다. 그러니 뜻밖의 참회는 밤길을 걸어 다다른 순례자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다. - 293쪽

현장이 답이다- 답사 정신의 백미

저자 이지누가 에디팅한 〈디새집〉은 2000년대 초 한 일간지에서 ‘잡지’ 형식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올해의 책’에 선정된 바 있다. 그만큼 사진과 기사의 퀄리티가 웬만한 일반 단행본 못지않고 오히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절터 시리즈에서도 이런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사진은 아름다우며 글은 적확하다. 이는 저자가 같은 장소에 수십 번이라도 찾아가 취재하는 현장 정신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결과다. 그는 단지 보기에 좋은 사진, 읽기에 좋은 글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 혹은 진실을 목적에 두고 작업한다.

이 책의 8장 부안 원효굴터 편에서는 이런 치열한 답사 정신의 백미를 목격할 수 있다. 그는 원효굴이 위치해 있는 우금암 근방을 샅샅이 돌아보며,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그림 〈우금암도〉에 대해 철저히 비판한다. 강세황의 그림을 보면, 개암사 뒤편의 우금암 봉우리가 셋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봉우리들의 높이는 왼쪽이 가장 높고 오른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낮아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선 최고의 화가가 그린 우금암의 모습은 이지누 저자가 가서 확인해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로는 봉우리가 두 개일 뿐이며, 높이도 오른쪽의 동봉이 왼쪽의 서봉보다 더 높다. 〈우금암도〉에서 묘사된 봉우리의 모습은 개수와 높이 면에서 전혀 뜬금없는 것이다. 이지누 저자는 수차례 이곳을 방문해 여러 각도에서 우금암을 바라보았지만 〈우금암도〉와 일치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이런 오류를 여러 자료를 동원해 비판하며, 여러 컷의 사진으로도 담았다. 그의 글과 사진이 얼마나 현장성에 바탕을 두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실을 목적으로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철저한 현장 정신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발견을 가능하게도 했다. 바로 우금암이라는 각자의 발견이다. 우금암 근방을 골골샅샅 조사하던 저자는 원효방을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 근처에서 이 각자를 발견했다. 이는 국내 관련 학계의 어느 자료에도 보고되지 않아 그 존재를 알 수 없던 것이었다. 이로써 새로운 유적을 발견하는 한편, 우금암의 주봉이 서봉이 아니라 동봉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마련되었다.

물론 이런 인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만이 절터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절터는 깊고 넓다. 위에 소개한 작업이 절터의 깊이라면, 이 책에 수시로 소개되는 아름다운 시와 소설은 절터의 넓이다. 불자와 유자들의 시는 물론,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서 《혼불》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고대와 중세, 현대를 넘나들며 절터를 풍성한 이야기로 그득그득 채워놓는다. 옛적에 법석이 펼쳐졌던 절터가 다시 소생하길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염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잊고 고요한 가운데 그저 쉬어도 좋은 것이 전라북도의 절터다.

알마 / 342쪽 / A5 / 2만 2000원

출처 : 출판사 서평

2012-08-14 / 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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