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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탁한 불교계에서 빛나는 진정한 간화선승! [문화] 글자크게글자작게

 

혼탁한 불교계에서 빛나는 진정한 간화선승!
성철스님과 봉암사결사를 이끈 주인공!!
보문선사

최근 심심치 않게 스님들의 파계행위가 뉴스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이러한 진흙탕 같은 한국불교계에 찬연히 꽃피었던 연꽃 같은 청정한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담아낸 신간이 민족사에서 출간되었다. 신간 《보문선사》는 그동안 전설과 구전으로 선방의 수좌 스님들에게만 회자되던, 알려지지 않았던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보문스님과 인연이 있던 22분의 큰스님과 교수, 거사들을 인터뷰해 모은 회고록이다. 이 책은 최근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로 얼룩진 승가의 위상을 되돌아볼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나아가 이 책을 통해 모든 스님들의 귀감이 될 어른 스님의 생애가 재조명될 것이다.

보문스님은 봉암사결사 초기에 입주한 스님이다. 이를 기억하는 몇몇 스님들은 보문스님이 성철스님, 향곡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결사를 함께 이끌었던 주인공이었음을 증언한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성수큰스님(몇 달 전 입적하셨음)은

“성철스님은 큰스님이기는 해도 견지가 똑 떨어진 사람이 아니여. 내가 보기엔 보문스님이 진짜 선승이지”(73-74쪽) 라고 회고할 정도로 보문스님을 높이 평했다.

신화 속으로 사라진 선승,
다시 찾은 큰스님!

근현대불교의 신화 속으로 사라진 선승이 있다. 선방의 수좌 스님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큰스님, 바로 ‘보문선사’이다. 보문스님을 회고하는 수많은 스님들은 모두, 보문스님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의 모범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렇듯 회고하는 스님들의 증언이 어찌 일치할 수 있을까? 그만큼 보문스님의 삶이 철저하게 수행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서암큰스님은 보문스님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큰절을 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서암스님과 보문스님의 일화이다.

서암스님은 어디 작은 토굴에 어떤 수좌가 정진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근처를 지나가다가 들렸다고 해요. 보문스님이 꼼짝 않고 정진에 열중하고 있더랍니다. 서암스님도 좌복을 깔고 앉았던 것이지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서암스님은 피곤해서 좌복을 배에 덮고 그냥 주무셨대요. 새벽이 되어서 벌떡 일어나 보니 보문스님은 어젯밤처럼 그대로 앉아 있더랍니다. 그런데 아침 공양 시간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더랍니다. 서암스님이 혼자 공양을 하는데 밥이 안 넘어 가드래요. 공양을 하고 가 보니, 그때에도 앉아 있고, 점심 때에도 안 일어나고, 저녁 때도 안 일어나고, 그 다음 날 새벽에 서암스님이 어디를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그제서야 보문스님이 서서히 일어나더랍니다. 그러니깐 하루 반 이상을 선정에 들었던 것입니다. 서암스님은 말이나 걸어보려고 나가려다가 그냥 또 앉았습니다. 보문스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앉더랍니다. 그러니 말도 붙일 형편이 아니어서 앉아 있는 옆모습만 지켜보다가, 오후에 약속도 있고 해서 토굴을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략) 어느 해 여름 서암스님이 도리사에 들렸더니, 어떤 스님이 똥지게를 지고 채전 밭에서 똥을 주고 있었답니다. 서암스님은 무심히 절에 들어가서 법당에 들렸다가 마루에 앉아 있으니 보문스님이 똥지게를 지고 들어오더랍니다. 보는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큰절이 나오더랍니다. (297-299쪽)

이러한 일화들을 읽다보면, ‘아, 진정한 수행자라는 것은 보문스님을 이르는 말이구나’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또한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보문스님을 회고하는 스님들 중 여러 큰스님들은 ‘보문스님이 오래 사셨다면 종정도 하셨을 것이고, 한국불교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이는 보문스님의 평소 수행정진, 판단력, 선지 등이 스님들의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문스님의 무소유, 홀로결사

보문스님은 탁발을 해서 거처할 수행처를 직접 일구고,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살 돈 외에는 모두 거리의 거지에게 나누어주었다. 탁발도 시장터의 길거리에서만 했는데, 보문스님이 반야심경을 외우며 발우를 들고 시장통을 걸어가면 시장터의 모든 사람들이 보시를 하고 길가에 엎드렸다고 한다. 발우에 담긴 지폐들이 바람에 날려 떨어져도 절대 줍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거지들이 스님의 주위를 따라다니며, 떨어진 지폐를 주워갔다고 한다. 이렇듯 보문스님은 철저하게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보문스님에 관한 다양한 일화를 담아내 진정한 수좌의 모습, 청정한 스님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처럼 혼탁한 시대에 밝은 연등과 같이 밝게 빛나는 보문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신간 《보문선사》에서 만날 수 있다.

보문 선사 연보

1906년 ; 경북 문경시 마성면 남호리 109번지에서 3형제의 장남으로 출생
             부친은 평산 신씨인 신성균(申聖均)
             속가 이름은 현묵(鉉默), 호적명은 기옥(奇玉)
             유년시절에는 서당 공부
             문경, 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0년 ; 큰아버지에게(申益均,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562번지) 양자로 입양
1927년 ; 결혼(부인, 朴甲仙)
1932년경 ; 대구사범학교 편입
1934년경 ; 대구 인쇄소 직공
1935년(30세) ; 부산 부두노동의 책임자로 근무
1936년(31세) ; 금강산 유점사를 거쳐 마하연으로 입산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득도
             법명은 현로(玄路)
             상원사에서 수행 중 깨달음
1939년(33세) ;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수행
             한암스님에게 자운(慈雲)이라는 법호를 받음.
1940~1945년 ; 상원사 선원 개혁 시도
             만행, 제방에서 두타행
             이 무렵부터 보문(普門)이라는 자호를 쓰기 시작함
1946년(40세) ; 오대산 적멸보궁 수행
             통도사 극락암과 내원암에서 수행
1947년(41세) ; 봉암사결사 참가(성철, 청담, 자운 등과)
1948~1952년 ; 법주사 복천암에서 수행
             도리사 태조선원에서 수행
             해인사 선원에서 수행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수행
1953년(47세) ; 팔공산 삼성암 토굴 수행
1955년(49세) ; 10월 경, 동화사 대구포교당 보현사 입주(주지)
1956년(50세) ; 음력 4월 6일, 입적
             동화사에서 영결식 거행
2002년 ; 오대산에 부도와 비석 건립
2012년 ; 보문스님의 증언 자료집인 『보문선사』 발간

민족사 / 376쪽 / 2만 8000원

출처 : 출판사 서평

2012-06-29 / 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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