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한국 불교
한국 불교의 위세는 위풍당당하다. 통계청 자료로도 1000만 불자를 헤아리며, 삼국시대부터 1600년 넘게 내려온 긴 역사는 다른 어떤 주요 종교보다 우리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보통 사람들도 절에 가고 불상에 절을 올리는 걸 마다하지 않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같은 경전의 구절이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같은 화두는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큰스님들은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고, 법정, 법륜, 도법, 명진, 혜민 같은 스님들은 이 사회의 ‘멘토’로 여겨지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막상 불교를 배우고 제대로 믿어보려 하면 이야기는 딴판이 된다. 한자로 가득한 경전은 너무 이해하기 어렵고 스님들의 말씀은 이게 대체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다. 화두니 선문답이니 하는 것도 어떻게 알아먹어야 하는지 일반 신자들은 알 수 없다. 중생을 구제해야 할 불교의 진리는 정작 중생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높은 가르침은 똑똑한 스님들만 알고 중생들은 나무관세음보살 외며 108배 3000배만 하면 되는가? 초보 불자들이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본래 정치학자인 저자는 불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런 답답한 현실에 부딪쳤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불교는 초심자에게 너무 불친절하고, 중요한 기초 교리를 쉽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고승들끼리 알쏭달쏭한 선문답만 주고받으면서 중생구제를 위한 실천에는 잘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스님들은 하지 않는, 또는 하지 못하는 불교 이야기를 이 책에서 펼친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 입문자들이 흔히 떠올릴 법한 질문들을 해보고, 내 나름대로 답도 한 번 만들어보고, 또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르는 채로 질문만 남겨두고, 그렇게 해 보려고 한다. 물론 전문가가 보기에는 가당치 않은 말도 있을 줄 안다. 하지만 그런 가당치 않을 수도 있는 말을 던지는 것 자체가 이 책 목적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들 중 많은 것들이 기존 입문서들에서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한 전문 분야에 대한 문외한인 지식인이, 그 전문 분야를 처음 접하면서 자기가 가진 지식을 통해 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때로는 가당치 않은 말들이 있을 줄 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들이 전문가이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나 해석들도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7쪽)
수행 따로, 중생 따로 한국 불교, 중생 곁으로 가라
저자가 느낀 한국 불교의 가장 큰 병폐는 승려들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승려들은 선문답과 고담준론을 논하지만 일반 신도들은 불교 경전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다. 저자는 공부하는 학자임에도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기초 교리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고, 제대로 된 입문서가 없는 탓이었다. 예컨대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는 다 엇비슷한 뜻인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모든 것이 비었고, 실체가 없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런 기본적인 질문과 의문을 불교에서는 잘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제행무상이니 제법무아니 하는 어려운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가르침이 있다며, 합리적ㆍ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알아서 깨달아야 한다며 신비주의적인 태도에 빠지기 일쑤다. 이래서야 불교가 발전할 수가 없다. 말로 전할 수 있는 진리는 말로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 자체도 더 밝고 희망적인 것으로 재해석될 필요도 있다. 불교는 대체로 ‘모든 게 덧없다’ ‘삶은 본래 괴롭다’는 식의 염세적이고 허무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걸로 여겨지고 있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사람이란 본래 종교에서 위안과 희망을 찾는데 “‘나’라는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 인간은 본디 괴로운 것이다”라면서 힘 빠지는 소리만 해서 되겠는가? 저자는 불교가 “고통 자체를 너무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극복과 해탈의 가능성, 행복한 삶의 길에 대한 인도를 강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픈 사람에게, 상심한 사람에게, 실패한 사람에게, 죽어가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줄 가르침을 베풀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 따로, 중생 따로’ 진단이 나온 한국 불교에 저자가 건네는 처방은 ‘중생 곁으로’다. 저자가 말하는 ‘중생 곁으로’는 기복신앙보다는 교리의 대중화와 실천적인 중생구제 방편을 마련하는 것에 가깝다. 자기들끼리 알 수 없는 선문답이나 주고받지 말고 사회봉사와 활동 등 적극적으로 중생구제에 나서라는 것이다. 불립문자나 뜻 모를 한문이 아니라 중생의 언어로 설법하라는 말이다. 56억 7천만년 뒤에 온다는 미륵정토를 말하기만 하지 말고 고통 받는 중생들의 삶과 함께 하라는 이야기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아무리 멋있게 말해봐야 대중은 못 알아듣는다. 나도 뭘 말하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그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지, 뭐 어쨌다는 말인가? “그안에 든 심오한 뜻을 너희들이 헤아려보아라.” 이따위 소리 제발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 바로 하시라. 그래야 나 같은 사람도 알아듣는다. 그것이 불교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다. 어렵고 심오한 얘기는 그대들끼리 하고 즐기되, 그것을 쉬운 말로 바꿔서 대중들에게 해달라는 말이다. (56~57쪽)
자력신앙이든 타력신앙이든 신앙만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중생구제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이명박정부들어 기독교 편향 정책을 펼친 정부와 불교계, 특히 조계종 종단 사이의 마찰이 심했다. 정부 잘못이 단초가 된 점은 명백했고, 이에 대해 항의하고 정책 변경을 요구한 조계종의 행동도 정당했다. 그러나 (...) 불교계가 그렇게 흥분하고 나선 것은 역시 그것이 자기 이익을 해치기 때문이었다. 한국 불교계가 다른 어떤 사회적인 공익을 위해 또 사회정의를 위해 그렇게 나선 적이 있었던가? (...) 티베트 승려들은 독립이나 자치권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베트남 승려들은 조국에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분신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한국 불교는 무엇을 했을까? (...) 개신교와 천주교는 민주화 투쟁을 하고 인권향상에 앞장서고 못 먹는 자를 위해 무료 급식소를 만드는데, 불교는 그런 일을 왜 안 할까?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만, 불교 교리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고, 특히 한국 불교의 성격이 더 문제라고 본다. 말로만 대승이지 진정한 대승이 아니란 말이다. (236~237쪽)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중생의 깨달음을 위하여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 한다. 그것을 위해 승려들은 일생동안 수행을 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모든 중생이 그렇게 깨달을 수 있을까? 또 그렇게 꼭 깨달아야만 할까? 저자는 속세를 사는 중생의 깨달음이 부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할 까닭에 이의를 제기한다. 승려가 되고 수행을 해서 얻는 깨달음이 있을 터이고, 속세에서 살아가며 얻을 수 있는 깨달음도 있을 터이다. 모든 중생이 부처나 보살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중생의 깨달음이란 석가모니와 옛 고승들이 앞서 깨달은 바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일상생활에서 평온과 행복을 얻는 것이다. 예컨대 집착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것. 꼭 필요한 욕심(이를테면 생존이나 생명탄생을 위한 식욕, 수면욕, 성욕)과 나쁜 욕심을 나눌 줄 아는 분별, 필요한 욕심이라도 넘치는 것을 경계할 줄 아는 중도의 마음가짐이 곧 중생에게 필요한 깨달음이다. 감히 따라 하기 힘든 어려운 깨달음이 아니라, 속세에서 해낼 수 있는 소소한 깨달음도 있어야 한다. 한국 불교가 선방에 틀어박힌 수행 중심에서 벗어나 중생을 위한 깨달음 전파에 널리 나서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강력한 주장이다.
마치 담배는 몸에 안 좋으니 끊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과 같다. 그거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금연을 실행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금연 홍보를 하고 금연 운동을 한다. 불교에 빗대자면 중생의 아상을 벗어나라고 설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금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 옛사람들의 말에 주석이나 달고 있을 게 아니라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현대적인 이론과 방법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불교에 대해 뭣도 모르는 내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한국 불교뿐 아니라 지성계 전체의 풍토를 알기 때문이다. 옛 권위에 편승하여 암기 주석하고 권력의 따스함에 안주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엄두도 안 내는 권위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위선 말이다. (228~229쪽)
또한 저자는 ‘혼자만의 깨달음’은 취미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진리의 눈을 얻겠다고 산사에서 평생 면벽수행만 하는 것은 등산이나 꽃꽂이와 다를 바 없다. 깨달음과 중생구제는 함께 가야 한다. 저자는 한국 불교가 대승불교로 자임하며 스스로 자리이타를 내세우며 소승불교와 구분짓고 싶다면 이제라도 실질적인 중생구제와 위로 방편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는 평화와 행복의 종교다
곳곳에 날선 비판이 가득하지만 사실 저자는 불교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는다. 저자는 불교와 인연을 맺은 이후 『법구경』과 『수타니파타』를 읽을 때마다, 고즈넉한 사찰 경내를 거닐 때마다, 또 소박한 명상에 잠길 때마다 어디서도 구하지 못한 차분함과 평온을 얻었음을 고백한다. 요컨대 불교는 염세와 고행의 종교가 아니라 평화와 행복의 종교다. 다만 저자는 자신처럼 전문적인 학자조차도 헤맬 만큼 어지럽고 난해한 가르침과 산중의 선방에 틀어박혀 대중을 위한 가르침보다 자신의 수행에 더 열심인 현상이 이 매력적인 종교를 중생과 유리된 ‘그들만의 불교’로 만들고 있다는 판단에 이 책을 썼다. 불교가 과거의 구태를 벗고 포교에 나선다면 얼마든지 더 대중적이고 중생의 삶에 큰 도움을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불자들과 교단이 멋모르는 이방인의 헛소리로 흘려듣기보다는 애정 깊은 한 초심 불자의 진단과 처방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해본다.
개마고원 펴냄 / 283쪽 / 15,000원
기사 출처 :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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