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등을 답니다. 지금이야 부처님오신날이 돼야 등을 달지만 원래는 각자 자기 집에 등 3개를 사월 초하루부터 켰습니다. 왜 3개를 켰느냐. 그것은 나도 부처님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원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탐심(貪心)이라는 어두움을 밝혀야겠다, 진심(瞋心)이라는 어두움을 밝혀야겠다, 치심(癡心)이라는 어두움을 밝혀야겠다는 원을 세우기 위해 3개의 등을 밝힌 것입니다. 부처님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 탐심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고, 진심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고, 치심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단 7일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초하루부터 등을 밝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체득하신 열반의 세계는 고(苦)와 낙(樂)을 초월한 세계,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세계, 선과 악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완전히 확립해서 사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고와 낙, 선과 악, 생과 사가 없는 진여의 세계가 부처님 세계입니다.
‘불살생(不殺生)’은 불교의 근본사상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나고 죽음〔生死〕의 꿈을 깨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애처로워서 죽음이라는 고해(苦海)에서 뛰어 나오라고 죽지 말라, 죽이지 말라, 안 죽는다고 외쳤습니다. 그것이 불살생입니다. 그것은 소나 개, 벌레 등의 타(他)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이 그 뜻을 잘 이해해서 판단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어 각자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인 줄 모르고 남의 목숨을 죽이지 않는 말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생사 밖의 도리가 여기 있으니 그 무서운 화탕에서 나오라고 소리쳐도 중생은 어두워서 잘못 듣고 딴 짓만 하는 것입니다.
쇳덩어리가 달나라까지 날아가는 시대에 불자들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뜻을 알아야 합니다. ‘종(宗)’자가 무엇인지, ‘교(敎)’자가 무엇인지, ‘신(信)’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종’자는 ‘높다’는 뜻입니다. ‘높다’는 것은 ‘변함 없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자는 ‘배우러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는 ‘변함없는 진리를 배우러 절에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를 배우고 보니까 내가 갈 길이 이 길밖에 없음을 깨닫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우리말로 바꾸면 ‘부처님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절에 가겠습니까. 우리는 절에 늙어죽지 않는 방법을 배우러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왕궁을 버리고 출가한 것도 늙어죽지 않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은 출가해서 12년 만에 늙어죽지 않는 방법을 깨달아서 부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절에 가서 물어볼 것은 물어보지 않고 남의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자기 늙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아들 손자 걱정을 합니다. 소인은 남 걱정하지만 대인은 자기 걱정합니다. 또 절에 가서 부처님께 늙어죽지 않는 방법을 물어볼 생각은 않고 쓸데없는 망상만 일으킵니다. 절에 가서 부처님하고 가까워지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공부할 생각은 않고 복을 달라고만 합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이 소원을 비는 기복으로만 흘러가고 있습니다. 밥 한 그릇 부처님 전에 올려놓고 복을 태산같이 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지으라는 복은 유루복(有漏福)이 아니라 무루복(無漏福)입니다. 중생들이 아무리 복을 삼생(三生) 동안 지어도 그 복은 진실한 복이 아닙니다. 한 생 동안 허둥지둥 재물을 모아도 도둑 맞을까봐 두려워 금고 안에 넣어두고 열쇠로 꼭꼭 잠궈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유루복입니다. 부처님은 물질적인 유루복을 지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수행이 있는 무루복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무루복은 천 년 만 년 가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들딸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또 한 번 복을 지어 놓으면 한 생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몇 생을 살아도 변하지 않습니다.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복을 달라고 빌지 말고 복을 지으라, 작복(作福)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복을 짓겠다고 밥 한 그릇 가져다 놓고 태산 같은 복을 달라고 빕니다. 그런 짓은 협잡군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을 짓느냐. 마음을 잘 내야 합니다. 복을 천 자리 만 자리 빌어놓고도 자기 신 위에 흙칠이 돼 있으면 “누가 이랬냐?”고 화를 버럭 내는 것이 대개의 사람들입니다. 복 짓는 것보다 복 관리하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내야 잘 내는 것이겠습니까.
염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염불의 ‘염(念)’자는 ‘이제 금(今)’ 밑에 ‘마음 심(心)’자입니다. 그러니 염불하라는 말은 ‘네 마음을 알아라’, ‘깨달아라’ 그 말 입니다. ‘염불했다’는 말은 ‘나는 내 마음을 알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처님을 부른다’는 말과는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부처님을 부르려면 만나볼 각오와 자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천 번 만 번 부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대하려면 자신이 깨끗하고 원만하고 훌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처님을 불러도 나오지 않습니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라고 했습니다. ‘3일 동안 닦은 마음이 천 년의 보배’라는 말입니다. 3일만에 뼈가 녹아나도록, 피가 말라 등이 타도록 애를 쓰고 지극정성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 부처님이 계시는 도리천에 이르면 삼천대천세계가 뚝 떨어집니다. 삼천대천세계는 바로 탐심, 진심, 치심입니다. 뚝 떨어지면 부르던 그놈이 바로 부처더라 깨닫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염불이고 마음을 바로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자들은 덮어 놓고 절하고, 덮어놓고 부처를 부릅니다. 부처님 같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말 한 마디라도 득이 되고 복이 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말아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인류의 살이 되고 뼈가 되는 말이 아니면 내뱉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걸음도 무게 있는 걸음, 덕이 있는 걸음, 현명한 걸음, 투철한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입은 헛말 안하고, 손은 헛일 안하고, 발은 헛걸음 안하면 비로소 ‘부처님 아들〔佛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 법문은 만불신문 57호(2002년 5월 15일자)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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